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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Jun 20. 2024

김훈을 읽은 날

각자의 장을 펼쳐들고

n년 만에 김훈을 읽으니, 학부 시절 졸업할 즈음엔 당연히 등단하고 스물아홉 즈음엔 신간 단편집으로 빵 뜬 신인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 망상하던 바보멍청이가 떠오른다.

평일 공강에는 점심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카페에 앉아 소설을 쓰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전주 서울을 오가던 마지막 일 년. 북토크나 낭독회, 때때로 연극이 주 용무였던 머나먼 길을 오갈 땐 보통 고속버스나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으레 흔들리고 소음도 심해 읽히지도 않는 책을 굳이 꺼내 펼치고 두세 시간 동안 겨우 열 쪽 남짓 읽던 바보는, 이제 10분짜리 유튜브 영상 하나 진득하니 보는 게 어려운 진짜 바보가 되었다.


바쁘디바빠 보이는 서울 도심에서 늘 혼자 여유로웠기에, 서울살이는 꿈일 수밖에 없던 시절. 그 해 이맘때쯤 이태원 맛집을 찾아 골목골목을 헤매다가 마주한 석양과 남산, 그 밑으로 늘어진 도시 전경 그리고 훅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던 바람. 좁은 모퉁를 돌아 펼쳐진 그 황금빛 도심은 절대 잊지 못할 시원함을 안겨줬다. 그 끝에 찾아 먹은 스끼야끼는 인스타그램 피드 저 밑 어딘가에 숨겨져 있고, 그날 낭독회에서 만난 작가와는 인스타 맞팔이 되었다. 이 도시에서 살면 이런 일들이 심상하게 찾아올 줄 알았지.


내게 김훈은 정확히 그 시절이다. 가장 좋아하고 잘하던 것을 유감없이 해보던. 그것을 감각하고 감히 꿈꾸던. 현실은 애써 외면하고 그토록 몰두했기에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가 되었지만, 원없이 행복했다. 무언가를 함으로써.

그 시절 감각이 되살아나면서도 지금 그의 글에 드러나는 노쇠에 서글퍼진다. 그는 황혼의 마지막 장을 펼쳤고, 내게 서울은 더 이상 낭만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이따금 그때 감각을 일깨워줄 뿐 마주해야 할 오늘은 맥없이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또 다른 낭만을 찾아 생을 뒤적거린다. 지금은 혼자가 아닌 둘이 찾고 있다는 게 그때랑은 상이한 행복일지도.


시간이 흘렀다.

유구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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