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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Nov 15. 2021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면

<윤희에게> 너와 나, 우리가, 윤희에게, 윤희를 통해

윤희와 새봄

상처를 입은 우리들은 그 상처를 무심하게 잊고 산다.

내 불행을 전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젠 그래도 될 것 같아서 피곤한 두 눈을 꿈뻑이며

과거의 상처들을 천천히 어루만지면,

내가 잊었으리라 생각했던 상처들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때의 날씨, 기분, 향기까지.

나는 잊은 게 아니었구나.


마음의 구멍이 좁혀지질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향하지만, 정체되어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윤희가 쥰을 만났다.


눈이 녹는다.


애써 모른 척한 거다. 남들도 다 아팠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팠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후회가 물밀듯이 들어와서

거기에 잠기기 싫어 애써 모른 척했다.


이제 잠잠해져서, 기억의 문을 열고 온전히 맞닥뜨리니

멈춘 게 아니었고 잊었던 게 아니었다.

쥰이 그랬다.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온다고.

그동안 잘 참았는데. 나는 더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보같이.

아팠던 순간에 내 잘못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을 테다.

수많은 선택이 항상 옳았던 게 아니었고

나는 주인공이지만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회한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가당착에 빠진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도 몸과 마음이 그대로다.


윤희도 똑같았다. 자식이 있으니까 멈춰있을 수는 없었어서 끊임없이 앞으로 향했지만 실은 멈춰있던 거다.

아 그랬구나. 나는 견딜 수 없었던 거였다.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거였구나.


영화는 그렇게 우리에게도 다가온다.

"그래, 실은 괜찮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우리도 윤희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 아픔을 온전히 잊고 사는 이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아픔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 구멍을 만들었고, 구멍은 뻥 뚫린 채로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돼도 나아지질 않는다.


대학을 가지 못했던 윤희는 새봄의 카메라를 보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쌤쌤이야. 나는 그것을 받았으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아서..

쌤쌤인 거야. 나는 카메라를 받았고, 그 대가로 상처의 울부짖음을 침묵하기로 한 거야.

그렇게 조용히 속에 담아두었으면, 끝까지 닫고 갈 것을. 윤희는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나지막이 한풀이를 했다.


우리 어느 순간 고백을 한다. 실은.. 제가..

후회와 죄책감이, 원망과 분노가 쌓일 대로 쌓여서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와서 고백을 한다.

진득하게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그 정도 과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코가 시큰해지고

아련한 눈물이 똑 떨어진다.

몸만 컸지, 고백을 하는 순간 그때의 감정이 휘몰아쳐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서 느낀다.


나는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그 정도 과거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다고 속였던 거구나. 너와 나를.

그렇게 바닥으로 또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버리면 나는 이제 어찌하나.


윤희는 그렇게 새봄의 손에 이끌려간다.

새봄은 윤희의 마음을 어림짐작하고 쥰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한다.

윤희가 쥰을 만난 순간.. 눈이 녹았고, 찬 겨울의 끝이 다가오는 듯했다.

앞서 적었던 수많은 후회와 고민의 종점.

영화가 해답을 말했다.

누군가 윤희에게 말하는 듯했다.


'네가 아팠던 건 네 잘못이 아냐. 너의 불행 또한 네 잘못이 아니야. 용기를 내. 용기를 내면 과거를 이겨낼 수 있어. 정말, 앞으로 향할 수 있어.'


윤희는 웃었고, 식당 일을 배우려고 한다.

앞으로 향한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면

너무 어두컴컴해서, 눈물이 앞을 가릴 때면

덮어 두었던 과거를 더듬어 내가 나에게 작은 손길을

내밀면 되는 거다. 마음이 멈췄던 그곳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면 되는 것이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용기를 낼 수 있다고.


내 바닥이 어디까지일까 보이지 않아서 한없이

침전할 때면, 함께 떨어지면 되는 거야. 눈 딱 감고.

핫 둘셋 숨 딱 참고 낙하,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돌아가자,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내 안의 계곡에서 풍덩, 후회와 죄책감의 바다로

빠져들어 정체되어 있는 내 마음을 끌어올리면 되는 거야.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던 바보 같은 나날들.

떨쳐버리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까지.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여려서,

마음먹은 만큼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도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마주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마주하는 것만이 앞으로 내디딜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든다.

윤희에게, 너도 용기를 낼 수 있어.

윤희를 통해, 우리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함박눈이 내리는 차디찬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그렇지만, 겨울 속에도 봄처럼 따스한 순간이 있다.

<윤희에게>처럼.


조금은 지난 이야기. 서로에게 날 서있는 현재에

이 영화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여주면 어떨까.

서로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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