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준호 Dec 19. 2021

내려놓음의 미학

김상혁, "떨어지는 동전"

떨어지는 동전

                                                           

거스름으로 받은 동전 하나가

우연히 손에 쥔 그것이

어쩐지 소중히 여겨지는 날이 있다네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 소년도 어느 날

그리 흔한 동전 하나에 연연하게 되었지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한

동전을 거슬러 받고는 그것이 그날의

모든 운수인 양 놓지 못했다네

손에 쥔 하나를 아침부터 놓지 못했어

형들은 씩씩해서 곧잘 절벽에도 오르고

힘이 센 아버지는 날카로운 도끼를 만지는 목수

아름다운 어머니는 부엌에서 종일 불을 다룬다

동전을 쥔 소년의 손에 땀이 흐르네

식탁에서도 변소에서도 그것을 놓지 못해

여리고 하얀 주먹이 나쁜 냄새를 풍겼지

형들이 다 눕고 아버지가 코 골고

어머니마저 잠들자 이불 밑에서 소년이 속삭인다

‘내가 우리의 행운을 지키고 있었어요.’

우연히 손에 쥔 동전이 어쩐지 소중한 날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한 동전을

거슬러 받고는 그것을 쥐고 잠든 날

이제는 그날의 모든 운수인 동전이

이제는 깊은 잠에 빠져버린 소년의 그 동전이      


김상혁,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中


손 땀내가 날 정도로 소중,

소년이 연연했던 떨어지는 동전의 서사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한 동전 하나를,

손 땀내가 날 정도로 소중히.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그 소년이

연연했던 동전의 서사.


누구든 소중한 것이 생기면 소년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정말 무엇이 됐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당연지사 소년처럼.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하든 여리고 하얀 주먹을 쥐고서 그것만 바라보고 있을 테다.


그게 계속되면 좋으련만,

현실이라는 잔혹함 앞에 서게 되면

동전은 단지 50원이라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손 땀내의 추억,

여린 주먹과의 추억,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흘려보내던 추억.

모든 것이 잊히는 순간.

정말 마른 빵 하나 값을 치르기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소년이었던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

더 이상 별 볼일 없는 것이 될 때,

남에겐 정말 하찮은 것이 돼버릴 때.

우리는 생각할 것이다.

그 모든 게 실망할 수 조차 없는 객기였구나.

내가 잡고 있었던 건 행운이 아니라

나의 객기였던 거구나.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위 문구는 김애란의 <비행운>을 꿰뚫는 문구이자 소년의 서사를 결정짓는 촌철살인이다(寸鐵殺人).


누구보다 희망찼을 과거의 나이자 소년들에게,

미래의 나이자 소년이었던 자들은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될 테니, 그놈의 객기 좀 그만 부려라"라고.

겨우 내가 된다. 이 말처럼 씁쓸한 게 어디 있을까?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붙이는 잔혹한 부사, '겨우'.

나의 한계와 현실을 직시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작가로 성공하겠다던 그는 이제야 영어 공부를 한다.

번듯한 하얀 셔츠, 한 번 입어보겠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나 탈출하고 싶었던 시시콜콜한

책상을 다시 바라본다.

같은 꿈이지만,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조연으로 살아가는 법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주인공의 삶을

배우고 살아간다.

어느 작품이든 주인공이 중요했다.

조연들은 주인공의 서사를 위한

부가 장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 빛나는 주인공의 삶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현실로 넘어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현실의 내가 무조건 주인공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조연조차 사치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나가는 행인 1, 대화하는 남녀 1, 2 등

내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너무나도 많다.


내가 쥐고 있던 행운이 소년의 서사처럼 흘러간다면

익숙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리 치이다 저리 치이다 결국, 흐려지고, 쓰러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조연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동심을 위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주다가

덜컥 현실에 내던져지면 그제야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때까지 뭐하면서 살았냐고, 노력이나 하고 살라고.


조연의 자리를 알려주지도 않고는

완벽한 조연처럼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 방법이 잘못됐다고 항의하면,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참 웃긴 세상이다.


이미 조연이 된 마당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동전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버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책상에 앉은 그는 정말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시니컬해지자, 우리.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는 게 어떨까?

동전이 떨어졌어도 다시 주우면 그만.

동전이 깊은 잠에 빠져버렸어도 다시 깨우면 그만.

50원이면 어때, 작가로 성공 못하면 뭐 어때.

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그려내던

그 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스스로 주인공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조연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거.

그게 더 중요한 거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의 미학.


조연으로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주인공의 삶에서 조연의 순간들을 발견해보자.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순간들은 시니컬하게, 놓아버리자.


소년이 동전을 내려놓고, 동전과 함께 잠이 들면

다음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년에게

주스 한 잔을 사줄 것이다.

시원하게 넘기라고, 조금은 씁쓸하더라도

주스 한 잔으로 넘겨보라고.


우리도 걸쭉한 음료 한 입 해보자.

그럼에도 나아가고 있으므로.

끝 맛이 참 쓴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