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딸이라는 클라이언트
아침에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다음 주면 개학이니, 막내 교복 바지의 기장 수선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리고, 입학식에 치마 교복을 입을 건지, 아니면 바지교복을 입을 건지 아이와 상의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여느 집에선 아무 일도 아닌 이 일로 난 며칠 째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 달 전 즈음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복을 받으러 간 날,
막내는 여자 아이라 치마교복을 무료로 지원받았다. 아이는 여자여도 바지교복을 입을 수 있다며
교복 받을 때 알아보자고 나에게 요구했다. 일단 치마를 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을 때
담당자분에게 속삭이며 여쭤보니, 바지도 가능은 하지만, 지금까지 딱 한 명만 그렇게 했다고
굳이 그럴 거 없다고 체육복 바지가 있으니 괜찮다고 한다. 내가 속삭여서 그랬는지 그분도 나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였는데 아이가 탈의실에서 나오며 말한다.
"다 들리거든..."
우리 아이가 바지교복을 선택한 두 번째 여학생이 된다는 담당자의 말에 난 그냥 얼른 치마를 선택했다.
아이의 실망한 표정은 모른 척했다. 셔츠 한 장을 더 구매하고 매장을 나오는데, 아이 발걸음이 느려졌다.
표정이 어두워지고, 어떤 소통도 하기 싫다는 듯 아이는 축 처진 문어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춘기를 지나며 아이가 종종 문어가 된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답도 없고, 이것저것 타당한 이유를 갖다 붙여보지만, 난 절대 정답을 맞힐 수 없다. 난 답답한 상태를 '문어 루이 14세'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그날은 이유가 명확했다.
치마가 아닌 바. 지. 교. 복을 입겠다는 것이다. 계단을 다 내려와 아이 표정을 다시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솔직히 흔들렸다. 큰애 키울 때... 왜 여자 아이들을 치마교복을 입혀서 그놈의 스타킹 맨날 올 나가고, 배 조이고, 가스 차고, 그러다 배 아프고, 겨울엔 다리가 땡땡 얼고, 두꺼운 기모 검정 스타킹 신겼다가 왕따 당하고... 얼마나 힘들었나. 난 교복세대가 아니라 처음엔 교복을 입고 중학생이 된 아이가 예뻐 보였지만,
6년 동안 치마 교복을 입으며 아이가 고생한 걸 다 봤으니, 그놈의 치마교복 꼭 그렇게 고집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슬며시 올라왔다.
"알았어. 그럼 바지교복 하나 사자."
"진짜?"
문어처럼 바닥으로 침잠하던 아이가 조잘대는 행복한 앵무새로 변신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 6만 원이 넘는 바지 교복을 사가지고 나왔다. 아무리 봐도 6만 원이나 할 옷은 아닌 거 같다. 바가지를 썼다는 느낌도 별로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아이에게 끌려다니는 엄마인가 싶어 마음이 또 불편해졌다.
"엄마가 치마 교복 별로라는 생각을 오래 했거든. 그 신념 때문에 바지 사준 거다.
니 문어 고집 때문에 바지 산 거 아니야."
이미 얻을 걸 얻어 낸 아이가 내 말을 귀담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 쇼핑몰 안 수선실에 바지를 맡기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니 즐겁다! 당연하다, 아이가 불편해할 주제는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들은 딸이 있어서 좋겠다고들 하는데, 그 좋은 딸이 이렇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라는 사실, 기분이 나빠지면 축 늘어진 문어가 되고 마는 현실. 문제의 그날이 떠오른다. 교복을 입고 증명사진을 찍던 날, 막상 사진관에 들어가니 여권 사진을 찍으러 온 남자분과 여자분들로 붐볐다. 일단 교복 상의를 입히려고 건물 화장실에 아이를 데려갔는데, 아이는 이미 문어가 됐다. 이유를 물어도 말을 안 한다. 루이문어 14세가 된 것이다. 방금 전 차를 타고 올 때만 해도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도 듣고,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 지에 대해 의견도 나눴다. 맛집에서 밥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큰 백화점
지하매장에서 디저트도 사자고 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나? 점심시간에 임박하기도 해서 허기가 졌나 싶어 일단 밥부터 먹고 찍자고 하니 거부한다. 하여간 억지로 아이를 달래 겨우 사진을 찍긴 찍었다. 안타까운 사진이 완성됐다. 사진사 아저씨의 표정도 나만큼 찜찜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백화점도 맛집도 다 소용없고, 내 마음이 그냥 바닥으로 내려앉아버렸다. 문어할아버지가 됐다. 사진관 바로 옆에 있는 솥밥집에 들어갔다. 한우비빔밥이 29000원인데, 그걸 먹겠단다. 아! 깜박했다. 문어이기도 하시지만, 루이 14세이기도 했지... 나는 기본, 백미솥밥을 시켰는데, 맛있다. 오랜만에 고가의 음식으로 입 호강을 하다 보니 내 마음도 누구러지고, 무엇보다 아이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나오는데, 아이가 불쑥 이런다.
"엄마, 나 사춘기가 맞나 봐."
"(그걸 이제 알았니? 이제야 인정해? 열 대만 맞자!!!) 엄마 생각도 그래..."
"엄마가 싫은 건 아닌데, 엄마가 하는 말이 다 짜증 날 때가 있어"
이유 없이 내 말이 짜증이 난다니... 이보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가 세상에 있을까?
"아까 사진 찍을 때 왜 그랬어?"
"사람들 많은데, 거기서 사진 찍을 생각 하니까 그냥 몸이... 말을 안 들었어."
"잠깐인데... 노력을 했으면 좋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
"난... 내 사진 괜찮은데? 그렇게 이상해?"
"... 엄마 앨범 봤지? 엄마 일곱 살에 찍은 증명사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등등등 "
"응."
"오늘 찍은 너의 그 사진도 그렇게 오래 어딘가에 존재할 텐데...
너의 문어상태를 이렇게 강렬하게 박제해 놓았다는 게 엄마는 기뻐."
"엄마 미워!!!!!"
가족 카톡방에 증명사진을 올리니, 남편은 다시 찍으라 하고, 큰 애는 표정이 왜 이러냐며 'ㅋ'를 열다섯 개 보냈다.
테이블에 접시가 치워지고, 커피가 나왔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심호흡도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다.
"입학식날 치마 입을 거야? 바지 입을 거야?"
"당연히 바지지."
"그냥 평범하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엄마는 내가 치마 입으면 좋겠어?"
"(응!) 꼭 그런 건 아니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 우연이가 가진 다양한 개성들 중에
바지! 그거 하나가 널 대표하는 게 싫고, 조금 걱정도 돼. 천천히 널 알리는 게 너에게 더 편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 결정은 네가 해."
쿨하게 위장한 게 오히려 효과가 있었나? 아이가 살짝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내 걱정이 너무 유난스러운가? 요즘 아이들, 치마나 바지나 다 상관없을 거 같기도 하고. 선생님들도 별생각 없을 실 수 있다.
"난 엄마가 여자는 치마 입어야 해! 그런 엄마가 아니어서 좋은데?
엄마, 여자는, 남자는, 그런 편견 없잖아."
"(내가 그랬나? 아닌 거 같은데...) 그... 렇지! 그럼. (이것은 아이의 주도면밀한 반격?)"
그래, 바지교복 사안은 할 만큼 했다. 이제 다음 사안, 문어루이 14세다.
"문어루이 14세는 어떡할래?"
"... 그건 진짜 노력해 볼게. 잘 될지는 모르겠어."
"그래, 오케이. 이제 나가서 바지 찾으러 가자! 바지 찾고, 웡카보고!"
"응!"
교복 바지라고 하니, 수선해 주시는 분이 바짓단을 하나도 자르지 않고, 손바느질로 예쁘게 꿰매주셨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오니 아직은 겨울이다. 볼이 시릴 만큼 찬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오늘, 아이가 중학교로 첫 등교를 했다.
꽃샘추위로 며칠 째 꽁꽁 얼어붙었다. 이 추운 날 잠자리 날개 같은 살색 스타킹을 입힐 생각을 하니,
이건 아니다 싶은데, 아이가 벌써 바지를 입고 나온다.
"나 추워, 그냥 바지 입을래."
"그래 잘했다. 추운데 뭐"
생각해 보면, 바지냐 치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러다 치마 입은 친구들을 보며 한번 입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겠지. 어렸을 적엔 바지 말고 공주 원피스 입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던 아이가 아닌가? 쓸데없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아깝다. 내가 무얼 해서 따듯하고 유능한 선생님,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다 해주고 싶다. 그런 게 없으니, 엄마는 기도를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길,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도 등교하길.
사랑하는 막내딸, 중학생이 된 거 진심으로 축하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