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 막내의 사춘기 육아일기
얼마 전 일이다.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막내는
식탁 위 자기 자리에 놓인 샐러드를 보고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이 몸이 축 늘어지며 바닥에 앉아버렸다.
이전 글(교복, 치마대신 바지도 괜찮아 (brunch.co.kr))에서 언급한 바로 그 문어가 됐다.
갑자기 나타난 샐러드도 아니다. 얼마 전부터 아이의 건강을 위해 식사할 때 먼저 샐러드를
먹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냥 일상의 연속일 뿐이었는데, 아이는 일요일이라는 해방감과 샐러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그냥 먹던 거 먹는 거라고 말 하니 아이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래, 그럼 (그놈의, 나도 남편에게 그토록 원하는) 공감이라는 걸 해주자.
우리 우연이 샐러드 먹기 싫었구나, 그래 그럴 수 있었겠다!라고 해주니
아이는 한술 더 떠 루이 14세가 된다. 고집의 벽을 더 견고하게 쌓고
아주 그 안에 들어앉아 버린다. 아이의 꾹 다문 입이 이렇게 외치는 거 같다.
감히 이런 끔찍한 샐러드로 일요일 아침 내 기분을 망치다니!
그놈의 사춘기... 부모를 향한 반항심이 아이 마음속에서 용암처럼 지글지글 끓고 있다.
혼내도, 달래도, 뭘 해도 해결될 거 같지 않다.
그냥 날 잡아 잡수라는 표정으로 아이는 버틴다.
실랑이의 시간은 길어지고, 점점 남편의 얼굴이 초조해진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도착해야 한다. 책임이 있다.
밀리면 1시간도 걸릴 수 있는 거리인데, 큰 일이다.
아이는 아빠의 사정이고 뭐고 그냥 지 기분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질긴 고무줄 같은 고집을 부리고 있다.
고무줄은 점점 더 팽팽해진다. 이러다가 딱 끊어져 어디든 날아가 누구라도 맞는다면 엄청나게 아플 것이다.
단순히 샐러드 때문이 아닌 건가? 도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건가?
이럴 때 정말... 돌아버리겠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에 도착해 아무 일 없는 듯 각자의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나니 밀려오는 피로감이 어마어마하다.
남편 얼굴에 간간히 어떤 감정이라는 게 스쳐 지나가는데
얼핏 죄책감, 아니 무력감? 참다 참다 마지막에 몇 마디 큰소리를 냈으니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고, 동시에 뭘 해도 아이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무력감도 느끼는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벽처럼 꿈쩍도 안 하는 아이를 상대하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중년이고, 내 속의 용광로도 만만치 않게 펄펄 끓고 있다.
그렇다고 요즘 육아를 함부로 할 수가 있나?
공감도 해줘야 하고, 기다려줘야 하고 하여간 조심 또 조심
안 그러면 아주 큰 일 난다고 난리들인데, 솔직히 이 정도 상황이면 진짜 작심하고
전쟁 같은 훈육을 할 수밖에 없다.
말도 안 되는 논리, 그놈의 '기'를 꺾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춘기가 지나가고 아이가 정신을 차리면 그땐 상황에 맞게 부모의 기가 꺾이는 순간도 찾아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바로 남편이다.
그는 내가 아이를 혼낼 때, 아버지에게 혼나던 자신을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 남편은 나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당했던 방식으로 아이를 혼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아이가 저 지경인가? 그런 생각도 드는 모양이다. 남편은 혼란스럽다.
나 역시 그렇다. 나를 비난하는 남편의 모습이 너무 싫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몇 개 없다. 그마저 있는 것도 최악이다. (나는 할머니랑 살았다.)
그래서 난 정말 아이를 혼내는 남편은 죽어도 못 보겠다.
나도 남편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고, 아이는 당황한다.
"난 못 봐, 오빠가 우연이 혼내는 거, 그냥 내가 하게 둬. 나는 아이와 풀 시간도 많고,
이해시킬 수도 있어. 하지만, 오빤 그런 사람 아니잖아."
"계속 저러는데, 한번 제대로 혼내고 끝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의 권위라는 게 있는 건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하니까 애가... "
"몰라... 유퀴즈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빠가 한없이 좋았다고 하고,
아빠가 폭력적이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김창옥쇼에 가서 우울증 있다고
정신과 치료받는다고 하더라..."
"... "
문득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최근에 본 영화는 아니라 제목도 가물가물했는데,
다행히 영화 '결혼 이야기'의 로라 던이 출연한 걸 기억해 냈다. 제목을 찾아보니
바로 휴잭맨이 아버지로 나오는 '더 썬'이라는 영화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났다.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기까지 태어난 상태다.
아들은 엄마와 둘이 살면서 사춘기 방황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모성이 아니라 '부성'에 집중하다. 마지막 장면이 강렬했다.
아버지가 걷지도 못하는 작은 아기를 데리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서 수영을 한다.
아기는 아버지의 손이 이끌려 넘실대는 바닷물 속에서 팔과 다리를 허우적 거린다.
마치 자궁 속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말한다.
자궁은 엄마에게만 있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에게도 자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궁을 잃은 아들이 느끼는 허무가 어떤 비극으로 끝나는지 보여준다.
스포 할 수 없는 강렬한 스토리가 담겨 있으니, 사춘기 자녀와 갈등이 심하다면
한 번쯤 볼만한 영화다. 그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는 영화는 아니고,
답답한 느낌도 있어 왜 나는 하필 이런 영화를 보고 있나? 힘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본 이유가 있었다.
영화니까, 침묵의 시위를 하는 그 사춘기 녀석의 입을 현실의 나는 열지 못해도 감독님은,
시나리오 작가님은 한번 열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말을 안 하니? 그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 거니? 자, 말을 해다오! 제발! 얼른!!
결국... 소년의 입은 열리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나버렸다.
아버지가 준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 긴 여운이 남았다.
만약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그늘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훨씬 편안한 육아를 할 수 있었을까?
요즘 김창옥쇼를 보면서 박수를 몇 번 치는지 모르겠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마음속 '진짜 말'을 한다. 그게 너무 좋다!
지난 방송 내용 중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여성이 아버지의 부재가 걱정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걱정할만하다. 우리 사회엔 '에비 없는 자식'이라는 욕이 존재한다.
하지만 김창옥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좋은 아버지가 아니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답변으로 그녀의 어깨에 얹힌 바위 같은 짐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방청객도, 고민을 털어놓은 여성도 크게 웃었고,
그녀의 슬픈 사연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한순간 밝아졌다.
아버지를 부정해도 괜찮은 세상이 온 것이다. 가부장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앞으로도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각자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서로를 비난할지 모른다. 아이는 당황할 것이고, 결국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어떻게든 이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우연아, 엄마 아빠는 너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란다.
그걸 잊지 마.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해."
+ 김창옥 강사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06화 마초가 당신 남편을 찾아올 때 김창옥을 던져!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