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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형 Jun 29. 2020

04. 2막 2장 <나의 얘기>

2막 2장 (2003~2005)


#2. 영국 맨체스터에서


모든 게 낯설었다. 쌀밥에서 스파게티로, 안녕에서 헬로우로, 검은 머리에서 갈색 머리로, 불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잠에서 깨어 2층 방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봤다. 나의 이 어리둥절함을 알리 없는, 아무 일 없는 듯 걸어 다니는 외국인(그땐 내가 외국인이었다)을 보는 게 얼떨떨했다. "「먼 나라 이웃나라」 책에서만 보던 그 영국에 내가 있다니!" 그렇게 영국에서의 첫 하루가 시작됐다.


우선 낯선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종우(이모의 아들)와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며 편의점은 어디에 있는지, 약국은 어디에 있는지, 식당은 어디에 있는지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동선도 익혔다. 나보다 영어를 월등히 잘했던 종우를 앞세워 괜히 편의점에 들어가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나는 뒤에서 숨죽이며 그 거래를 지켜보았다.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푸르른 잔디가 어디에나 있는 게 신기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흙먼지를 가로지르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를 하곤 했다. 골대가 달린 축구장이 군데군데 있는 것도 신기했다. "축구는 진짜 원 없이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네 친구들도 사귀게 됐고,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오후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했다. 이미 K-리그를 제패하고 온 실력이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축구 잘하면 장땡이었다.


학교를 찾아야 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오지 않았고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공립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모부께서 미리 정리해둔 사립학교 리스트를 훑어봤다. 학비도 학비지만 영어가 문제였다. 사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울산 소재 ○○학원 특별반에서 연마한 콩글리쉬로는 어림도 없었다. 영어, 수학 그리고 IQ 테스트(오늘날의 인적성 검사) 비슷한 걸 봤었었는데, 수학은 최우수 점수를 받았지만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에게 영국 수학이 쉽다). 다행히도 학교를 알아보던 기간은 방학기간이었고, 영어 공부를 압축적으로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이모, 이모부가 삼성 미래전략실에 버금가는 밀착 과외를 매일 해주셨고, 덕분에 영어 실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매일 100-200개 단어를 기계적으로 외웠으며 전날 외웠던 건 또다시 시험을 봐서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영어로 된 동화책을 읽으면서 문장을 익히기 시작했고 티비, 라디오, 오디오북 등을 통해 귀를 트였다. 되든 안되든 집에서도 영어로 소통했다. 이를 어기면 벌금을 냈다. 동네 영국인 친구들도 큰 도움이 됐다. 아쉽지만 그 친구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한 학교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교복이 비싸서 얼마 전 졸업한 한국인 형의 교복을 물려 입게 됐다.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정장 비슷한 예쁜 교복이었지만, 중고였던지라 사용감은 있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 집이었으면 새 걸로 사줬을 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사춘기가 오고 있었나 보다.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입학 전 학교에서 진행하는 여름 축구캠프에 초대됐다. 학기 전 친구들을 미리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됐다. 영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등록돼있던 종우도 이례적으로 함께 했다. 친구들은 반갑게 맞아줬고 역시 축구를 하면서 금방 친해졌다. 첫 질문이 "Where are you from?"이었고 두 번째 질문이 "Which football team do you support?"였다. 영국에서는 어떤 축구팀을 응원하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Jack을 따라 맨체스터 시티를 응원하게 됐다. 물론 바로 곧 정체성을 찾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마음을 바꿨다. 인기도 많고 학교 모범생이었던 Jack이 옆에서 말도 걸어주며 잘 챙겨주었다. 한 달 간의 축구캠프 기간 동안, 친구들 집에 초대되어 식사도 하면서 영국 생활에 완벽 적응해나갔다. 특히, 쌍둥이 Mark, Anthony와의 만남은 전설의 시작이었다 (훗날, 이 친구들과 대학 입학 전까지 약 4년을 함께 살게 된다). 이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좋았던 게, 쌍둥이인지라 영어를 쓸 대상이 최소 두 명이나 있어서 영어가 두배 빨리 느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누나 Jennifer가 당시 일본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어머니 Diane이 아시아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 동아시아 골동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셨는데, 나중에 같이 살 때는 나를 위해 한국 장식품을 많이 사오셨다. 아버지 Lee는 전형적인 익살스러운 영국 아저씨였는데, 같이 축구를 보다가 Anthony에게 "Does he understand swear words? (이 친구 욕도 알아듣니?)" 질문했다. 내가 답변을 가로채 웃으면서 "Yes, I do"라고 대답하자 눈이 휘동그레지셨던 재밌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나의 맨체스터에서의 첫 몇 달은, 정신없이 영어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는, '훈련소' 일상의 반복이었다. 수료일에 가까워지자, 자대배치, 즉, 정식 입학일이 성큼 다가왔다. 혼자서 수만 가지의 가정과 상상을 해보며, 긴장감과 설렘으로 잠을 종종 뒤척이곤 했다.




https://brunch.co.kr/@hopeconomist/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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