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3장 (2003~2005)
#3. 영국 맨체스터에서
입학 당일,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전체 대화 중 10~20% 정도였다. 친구들이 웃으면 따라 웃고, 알아듣지 못했을 때도 그냥 웃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나 보다. 사용감 있는 교복과 한국에서 사 온 반짝반짝 새 구두가 양극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전교생 중 두 번째 아시아인으로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교장선생님 Mr. Blackburn과 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캠프 내내 날 챙겨준 Jack, 집에 초대하여 식사하고 하루 종일 같이 PlayStation 게임을 한 쌍둥이 Mark, Anthony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광팬 Josh까지. 여학생들의 눈을 마주칠 때면 순간 경직되어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눈앞이 캄캄했고 구두 속 내 엄지발가락에 압력이 집중됐다. 영화에서만 봤던 헤르미온느 열댓 명이 앉아있는 것 같았다. 우연이었을까, 담임선생님 Mr. Brown은 축구캠프 때 우리를 관리감독하신 분이셨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 뉴캐슬 유나이티드 축구팀 열혈팬이었다. 말에 늘 농담과 sarcasm이 내포돼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귀가 트이기 시작하면서 어떤 성향인지 알게 됐다. 한 일화로는, "What do you eat in Korea?" 질문에 "We eat rice"라고 답했는데, Mr. Brown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고 "What? lice?"라고 받아쳤고 반 친구들은 웃었다. lice는 louse의 복수 형태로, 머리의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내가 r과 l 발음 구분을 잘하지 못한 것을 희화화한 것이다. 시각에 따라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것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깨닫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악수를 청하며 "We were lucky to have you. Good luck in your future"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렇듯, 초반 몇개월은 귀머거리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이 전학생에서 재학생으로 점차 자리 잡아갔다.
수학은 우등반, 영어는 열등반에 배치됐다(누가 외국은 경쟁이 없다고 했는가?).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선생님 외에 개인 교사가 배치되어 나를 도와주셨다. 그리고 그 당시 Sharp에서 나온 전자사전을 교복 안 주머니에 항상 들고 다녔는데, 친구들은 그걸 신기해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욕설과 야한 단어들을 검색하여 소리 버튼을 눌러 낄낄거렸다. 수업시간에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가 괴상한 기계음으로 울려 퍼져 반 친구는 detention(방과 후 학교에 남아 받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수학시간이 제일 기다려졌다. 선생님이 문제를 주고 다 풀면 손을 드는 방식이었는데, 계산기를 써도 느린 반 친구들에 비해 한국식 교육을 받은 나는, 암산으로 모든 문제를 속전속결로 풀어 전형적인 '수학 잘하는 동양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수학 선생님의 눈썹이 자주 올라갔었던 기억이 있다. 영국 역사를 어려워했고 미술, 식품공학 등에 흥미를 느꼈다. 과학 중에선 생물만 좋아했고 화학, 물리를 싫어했다. 영문학에 흥미는 있었으나 문법이 어려웠고,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곧 잘했던 것 같다. 프랑스어 시간에는 파리 공항에서 마주한 흑인이 가끔 떠올랐다. 체육시간에는 올림픽 스타마냥 날아다녔고 '수학 잘하는 동양인' 이미지에서 '수학과 운동을 잘하는 동양인' 이미지로 발전했다.
스포츠의 나라 영국 답게, 학교 내에서도 다양한 체육 프로그램이 있었고, 나는 이를 100% 즐겼다. 특히, 학교 대표로 100m, 400m 달리기, 계주, 허들, 멀리뛰기, 높이뛰기, 크로스컨트리 등에 참가하여 성과를 냈다. 크로스컨트리 맨체스터 지역에서 3등을 했고, 전국에서 7등을 했다. 매주 있던 다른 학교와의 축구 경기에서도 매번 골을 넣으며 팀을 견인했다. 이렇게 열심히 한 원동력은, 바로 관종끼 때문이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말로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몸으로 하는 건 자신있었다. 학교에서 매일 아침 assembly(조례)를 했는데, 그때 내 골 득점자로 이름이 호명되면 전교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 짜릿함에 중독됐었던 것 같다. 내가 유일하게 전교생 앞에서 주목 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https://brunch.co.kr/@hopeconomist/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