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1장 (2011-2015)
#1. 대학교 1-2학년
드디어, 왔다. 혼자 이 악물고 끈질기게 버텨온, 그 외롭고 헛헛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물론 힘들었던 건 맞지만, 다가올 보상의 크기를 더 키우려, 일부러 어둠 속으로 더 치열하게 들어가기도 했던 것 같다. 가수 오반의 <행복>이라는 노래 가사 중 "난 배부른데 자꾸 찾아가 불안 속으로 일부러"가 있는데, 비슷한 감정인 것 같다). 10월 3일이 입학 날이었고, 일주일 전에 맨체스터에 도착하여 영국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몇 년 동안 살 부대끼고 살았기 때문에 정도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역할과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셋째 아들로 분류됐다. 나도 그게 편했다. 가끔은 이불을 개지 않아 잔소리 듣기도 했다. 그동안 감사했노라, 브리스톨에 가서도 자주 왔다갔다하겠노라 말씀드리고 기차에 올랐다. 늘 그렇듯 실천은 엉망이었다. 아마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말씀하셨던 투박한 아버지의 영향이 큰 듯하다.
기차역 밖으로 나와 처음 마주한 브리스톨은 정말 예뻤다. 날씨마저 내 편을 들어준 듯 환상적이었다. 맨체스터 날씨가 늘 회색빛을 띄었기 때문에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내게 더 크게 다가왔다. 미리 예약해둔 택시에 짐을 싣고 기숙사로 향했다. 1지망 기숙사는 떨어지고 The Hawthorns라는 기숙사에 배정받았는데, 알고 보니 학교 안에 위치해 있고 선호도가 매우 높은 곳이었더라. 혼자 살기에 방도 말도 안 되게 컸고, 덕분에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행정 실수가 의심되어 직원한테 물어봤더니, 여기가 맞더란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짐을 풀고 어디에 앉아 있어야 할지 몰라 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기숙사 flatmate들과 인사를 나눴다. 철학, 공학, 정치학, 연극영화학 등 다양했다. 옆방에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도 있었다. 하나의 주방과 두 개의 화장실을 6명에서 공유했고, 한국에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남녀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영국 드라마 <Skins>에서 볼법한 그런 기숙사 로맨스는 없었다. 뭐.. 본인 빼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당시 한국에 여자친구를 남겨둔 채로 롱디를 시작하게 됐고, 당일 저녁에 한인회에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만났던 재학생 선배들을 브리스톨에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첫 주에는 Freshers’ Week에 참여했다. 한국으로 치면 신입생 환영회 정도가 될 것이다. 일주일 동안 학생회에서 운영하는 동아리들을 탐색하고 여러 이벤트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는 기간이다. 그냥 뭐 쉽게 말해서 술 먹고 노는 기간. 파티가 매일 있었다. 그렇게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내면 수면부족과 면역력 저하로 많은 학생들이 Freshers' Flu라는 것에 걸리기도 한다. 대학에 와서도 영국인, 한국인 친구들을 균형 있게 사귀려고 노력했다. 영국에 오래 살긴 했지만, 이런 걸 의식한다는 자체가 교포 친구들과 다른 점이었다. 일단, 영국에서 전 교육과정을 밟았다는 것이 큰 무기였고, 이야기 소재가 많았다. 소재가 떨어지면 만병통치약, 축구 얘기를 꺼냈다. 서양문화에서는 남자다움이 중요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몸에 힘을 많이 주고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 얘기했다. 깔끔하게 면도를 했지만, 괜히 수염 나는 부분을 만지면서 얘기했다.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만큼 체력 소모도 컸다. 동아리로는 한인회, 축구 동아리, 경제/금융 동아리에 가입했다. 하지만, 점점 바빠지면서 (게을러지면서) 자주 참석하지 못했고, 한인회를 중심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1학년 땐, 사실 경제학이 정확히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지 몰랐다. 고등학교 때는 단순 그래프와 경제 현상에 대한 분석 정도로만 인식했는데, 대학에 오니 수학으로 시작해서 통계에서 끝났다. 입학 전, faculty에서 선행 공부할 리스트를 이메일로 보내줬었는데, 설렁설렁했던 탓인지, 많이 고전했다. 문제가 주어지자 막힘 없이 답을 써 내려가는 중국, 인도 친구들을 볼 때면 현타가 오기도 했다. 당시 교수님들은 수학, 통계학, 계량경제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계량적 접근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고 경제학이 현실세계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제학이 철학, 윤리학, 역사학에 더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주류 경제학보다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더 흥미를 느꼈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성적도 주전공인 순수 경제학보다, 선택 과목이 더 높았다. 전과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높은 입학 점수로 더 낮은(?) 비인기(?) 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땐, 그게 중요한 줄 알았다. 2학년 때 서울대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몇 달 동안 서울대입구역 부근에 단기임대 방을 구하여 통원했다. 이지홍, 김영식 교수님께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을 배웠고,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대학의 로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며 즐거운 한국 대학 생활을 보냈다.
내가 느낀 영국대학과 한국대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순 지식 전달에 머물러 있는 한국대학에 비해, 영국대학은 '문제 해결 능력'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영국대학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수업이 있다. 강의(Lecture), 워크숍(Workshop) 그리고 튜토리얼(Tutorial)이다. 강의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수업과 비슷한 개념이고, 워크숍은 학기 시작 전이나 시험기간처럼 보충이 필요할 때 개설되는 수업이다. 튜토리얼(tutorial)은, 5-10명 정도의 학생이 담당 Tutor(교수가 될 수도 있고 박사생이 될 수도 있다)에게 밀착 지도를 받는 개념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규강의의 이해도다. 튜토리얼의 첫머리는 정규강의의 내용에 대한 확인부터 시작된다. 학생들이 정규강의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과제물은 튜터와 함께 풀어본다. 정규강의 시간에 받은 과제를 튜토리얼 때 제출하고, 비슷한 문제를 함께 풀며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또한, 단순 풀이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답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예를 들어, 과 친구 James가 "최저임금은 인상되어야 합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으면, 교수는 나보고 James의 주장을 반박해보라, 보충해보라, 예시를 들어보라 등 꼬리 질문을 던지며 뇌를 가만두지 않는다. 또한 "James, Andrews, Jessica가 말한 것을 요약해보고 너의 입장을 밝혀라" 류의 질문도 이어지기도 한다. 학생과 교수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수준 높은 논리적인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재미있다. 일관되고 논리적인 사고력을 기를 수 있고, 처세술이나 커뮤니케이션 스킬 또한 배울 수 있다. 매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영국의 '총리 질의응답 시간(Prime Minister's Question Time)'을 보면, 영국 총리와 국회의원들 간 설전이 오가는데, 수준이 말도 안되게 높다. 이는 아마 대부분이 영국식 토론교육을 받아서일 것이다.
영국에 다시 돌아와 한인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왜 출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자연스럽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하고 가장 잘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당선됐고 1년 동안 재밌게 운영했다. 잡음도 많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술 먹고 헤어지는 모임이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무언가'를 창출하고 싶었다. 정보 교류, 친목 도모, 대학교 홍보와 더불어 신입생, 재학생, 졸업생들의 소통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신입생, 재학생들에게는 알찬 정보를, 졸업생들에겐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한국 대학교와는 다르게, 영국 대학교 내 한인회의 장점은, 학석박 그리고 교수님까지도 비교적 쉽게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 대학원생들은 한 두 명 볼까 말까 한다는데, 우리는 그런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내가 어디서 그런 대단한 분들을 허물없이 만날 수 있으랴. 학생회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네이버 등 주요 검색 포털에 검색되게 하며 대내외적으로 홍보를 했다. 신입생 환영회, 하계 OT&MT, 마니또, 체육(축구, 농구, 배드민턴) 활동, 총동문회, AGM, Formal Dinner, K-Pop Party, 한국어 수업, Internaltional Food Village 등을 성공적으로 기획하고 개최하면서, 사회에 나가기 전 작은 단체를 운영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급하게 먹었던 것일까, 가끔은 체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인 사회 중심에 있다 보니, 각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대 초반이 혼자 극복하기엔 버거웠지만, 수년간 닦아온 맷집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정신없는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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