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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Aug 11. 2021

왜 칼로 물을 베려고 하는가?

기억은 짭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줘

코로나 시대를 벌써 20개월 넘게 살아가고 있다. 백신의 개발과 유통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진화해가는 병균에 아직까지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우리는 생존을 위한 방책을 고안해 내었고, '마크스 쓰기', '사회적 거리 두기'와 '증상자의 격리'는 그 효과가 증명된 방법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늘어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가족들과 함께해야 하는 시간'이다.


극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여름휴가를 앞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정을 정리하고 있던 내게 아내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여보 큰일 났어, OO이 반에서 확진자가 나왔데!    


방금 전까지 동료들과 점심 먹고 시시덕거리며, "다들 조심합시다. 휴가 앞두고 괜히 저녁때 엉뚱한데 어슬렁 거리다가 확진자 동선 겹치기라도 하면 자가격리 2주.. 휴가 내내 집에서 방콕 하는 거야 알지?"


그 시시덕 거림이 저주의 주문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왔다.


막내는 다행히 검사 결과 음성으로 치료시설 입소의 생이별은 면하였지만, 반 친구 확진 케이스는 자동으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므로 2주 자가격리를 통보받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휴가기간에 하기는 너무도 가혹한 '온 가족 강제 집콕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휴가 스케줄이 취소됨과 동시에, 막내가 안방에서 격리된 채 온 가족이 한여름에 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감히 집 밖에 나가지도 배달음식을 시켜먹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삼시 세끼를 자급자족하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열대야까지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였지만 에어컨의 사용은 집안 물자의 보급과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아내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또한, 비록 비상상황이었지만 발열 등의 별다른 증상이 없었던 아이들은 '매일 해야 할 일들'의 열외에서 제외되었다. 자연을 벗 삼아 휴가를 즐겨야 할 시간에 외부와는 단절된 고립된 벙커 안에서 원래는 하지 않아도 될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수용자들 주위에는 항상 전운이 감돌았으며 일촉즉발의 상황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찾아왔다.


(장면 1)

"아니, 이거 머리카락 굴러다니는 거 안 보여요?"

"어 못 봤는데? 왜 엊그제도 청소기 한번 돌렸잖아?"

"아니, 매일 24시간을 4명이 뒹구는데 청소를 삼일에 한 번만 하면 어떻게 해요? 아 진짜 더러워 죽겠네!"

"아니 그냥 좀 해달라고 하면 되지, 왜 신경질부터 내고 난리야!" (이하 생략)


(장면 2)

"아이 짜증 나, 에어컨 좀 켜고 하면 안 돼요?"

"아니, 꼭두새벽부터 에어컨을 틀면 전기세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선풍기 좀 켜고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

"지코 말이 구라가 아니구만.. AC" (ZICO- Summer Hate feat. Rain)

"너 뭐라고 그랬어, 이리 와봐!" (이하 생략)


거의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올라가는 언성과  오고 가는 불편한 멘션들이, 가뜩이나 좁아 보이는 집안의 구석구석을 채우며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짜증나고 불편스런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향한 전투 욕을 더욱 불사르게 하는 '결정적 한방'이 있었으니, '범죄현장은 있으나 범인이 없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장면 3)

"화장실에 누가 불 자꾸 켜놓고 나오니? 아까도 얘기한 거 같은데, 또 이러네!!"

"나는 아님. 화장실 간 적이 없음"

"이번에는 저도 확실히 아녜요"

"나는 여기서 격리 중이라 저기 화장실 안 쓰잖아요"

"아니, 그럼 내가 그랬단 말야?"


결과는 있는데 원인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 반복된다. 냉장고에서 꺼내놓은 물병,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치우지 않은 과자 봉지,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혼자 돌아가는 선풍기...


심증은 있지만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범은 한사코 자신의 소행이 아님을 주장한다.


"야, 아까 니가 그거 먹고 있는 거 봤는데?"

"뭔 소리예요 나는 분명히 버렸어, 아빠가 아까 안 버린 거 아녜요?"

"나는 항상 먹고 딱 버리는 스타일이지, 니가 맨날 까먹잖아!"

"아니 당신 지난번에도 안 버리고 그냥 놓고 가는 거 내가 봤는데? 애한테 뒤집어 씌우긴.. 참내.."

"뭔 소리야! 진짜 내가 아니라고!"


정말 집에 CCTV를 하나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판사님 제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씀다."



과연 우리의 기억은 완전한 것일까? 기억에 대한 장애 중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것으로 '기억 상실증'이 있다. 그리고 드물게 천재들이나 일부 조증/망상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억 과다증'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자주 발생하는 현상인 '기억 착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억 착오'는 치료가 필요한 장애라기보다는 그저 누구에게나 가끔은 일어나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약간의 착오는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곧 합의하여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있는 영역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지하게 되면 보통 적극적 치료로 연결되기 마련인 '기억 상실'이나 '기억 과다'보다는, 이 '기억 착오'야말로 우리의 삶에 큰 해악을 끼치는 중대 질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기억의 장애는 기억 착오라는 현상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를 이른다. (중략)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데, 사실과 다르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하였다가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되는 경우를 '회상성 조작증'이라 부른다. 실제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사실과 아주 다르게 그럴듯하게 기억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작화증(作話症)'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기억은 여러 가지의 정신적인 기능을 대변하는데,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기억되었다가 그 기억이 나중에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이다.
<조수철 서울대 의대 교수의 2004년 세계일보 기고문 중 발췌>

부부싸움은 왜 일어나는 걸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은 또 왜 그런 것인가? 하늘의 별만큼의 많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사소한 것'이 그 이유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생각을 한다. 또한 그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된 갈등은 그것을 따지고 소명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기억의 다름'으로 인해 종종 큰 분쟁으로 발전하곤 한다.


필자는 40대 중반을 넘겼고, 또한 어떤 일이 집중하거나 멍을 때리게 되면 모든 감각기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일 반복하는 일이거나 루틴이 자연스러운 일들은 사실 기억 저장소를 거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에 자기 전에 이를 닦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러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입김을 불어 냄새를 맡는 경우가 빈번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아주 드물긴 하지만) 버스 타는 곳까지 가서야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리고 그제야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건네도 답을 하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던 이웃을 욕하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런 상황일진대, 아까 내가 과자 껍데기를 제대로 버렸는지, 화장실의 불을 껐는지 안 껐는지를 '매우 정확하고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다. 그래 봐야 어쩌다 한 번이겠지...


만약 나와 상대방 기억의 불완전성을 알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위한 '여유 간극'이라는 것을 둘 수 있다. 설마 독자들 중 다리가 삐어 목발을 쓰고 있는 자녀에게 "왜 이렇게 빨리빨리 못 다니니?" 하며 핀잔을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그래 천천히 해. 조금 늦어도 문제없어"라고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기억도 가끔은 '삘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말실수나 잘못된 변명에도 과한 판단과 심한 질책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잘못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이 놈이 잘못한 데다 더해 거짓말까지 하네?'가 아니라, '기억을 조작하는 것 보니 많이 당황하고 무서운 게로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상황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일부 독자들의 마음이 읽힌다. 그분들을 위해 '뇌과학'에 대한 쉽고 인상적인 대중서를 펴낸 David Eagleman의 'The Brain'에 나온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가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참고로 그녀는 뇌과학 기억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한 미국의 대학교수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기억 조작에 취약하다. 로프터스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가 어릴 적에 그녀의 어머니가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여러 해가 지나 그녀는 한 친척과 대화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수영장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로프터스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실제로 그녀는 친척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일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기억하는 다른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이를테면 구급대원들이 언제 도착했는지 말이에요. 그들이 내가 산소마스크를 주었던 것을 생각했죠. 혹시 내가 시신을 발견하고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산소마스크가 필요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물 위에 뜬 어머니의 시신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친척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착각했다고 전해왔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어린 로프터스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모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프터스는 풍부한 세부사항과 강렬한 감정까지 동반한 가짜 기억을 보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뇌과학에 정통한 교수님도 피해 갈 수 없었던 '거짓 기억'을 자신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새빨간 거짓이 아닐까 싶다. 대체 뭐가 두려우신 건가요 당신?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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