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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Jun 18. 2021

왜 나는 책을 못읽나?

책 읽기 느림보 작가

영화를 즐겨 본다.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 들인 티가 팍팍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몰입하여 보는 종류는 복잡하고 숨 막히는 구도 속에서도 속도감을 잃지 않는 빠른 전개로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작품들이다. 눈과 머리를 혹사시키면서 희열을 느끼는 타입.  


글을 읽을 때도 상황은 비슷하다. 소셜미디어를 즐기는 것은 물론, 직업상 매일 일정 분량의 기사나 정보 검색을 통한 텍스트를 소화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 거의 사진을 찍듯 글을 읽게 된다. '찰칵, 다음!, 찰칵, 다음!'. 그러니 아무리 긴 분량의 글이라도 스크롤해나가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마치 '글의 분량'이라는 파도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열심히 패들링을 하는 서퍼처럼... 그렇게 글을 읽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이 있다. 영화를 볼 때나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텍스트 읽을 때는 펄펄하던 '집중'과 '속도'가 활자를 인쇄한 '책'을 읽을 때 맥없이 힘을 잃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나'는 무지하게 산만하고 아주아주 느림보이다. 작정을 하고 읽어도 하루에 몇십 페이지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문제인 것은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읽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벌려 놓고 읽는다. 지금 이 순간도 같이 읽고 있는 책이 4권이다. 그중 어떤 책은 봄이 오기 전에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다.


작가를 꿈꾼다는 사람이 이렇게 책을 읽는 게 느리고 집중을 하지 못해도 될까 싶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책을 못 읽는 걸까?


'책 읽는 나'를 관찰해본다.


(장면 1)

1. 책을 펴 들고 몇 줄을 읽는다.

2. 얼마 안 되어 기막힌 생각이나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3. 감탄하며 내용을 기록한다. 어떤 때는 작가의 생각을 실천해보기도 한다.

4. 적어놓은 글을 되뇌어본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 상념에 잠긴다.

5. 커피가 당긴다. 커피를 내리러 간다.


(장면 2)

1. 책을 읽다 잘 모르는 이름, 개념, 지명 따위를 발견한다.

2.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검색을 한다.

3. 관련 글을 읽는다. 글로 충분치 않아 연관 이미지 검색이나 유튜브를 찾아본다.

4. 그 나라, 지역,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해 지도 앱을 펼친다. 스트리트 뷰로 이리저리 쏘다녀 본다.

5. 시간이 꽤 흐른다. 오늘은 까지.


쯧쯧.. 이러니 진도를 못 나가지..

'진도를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편으론 진도를 빠르게 빼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 책 읽는 시간 거의 유일하게 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천천히 즐기는 것이 문제가 될 리가 없다. 느림보 좀 어!


평소에 빠르게 지치던 길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천천히 걷게 되다 보면 평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물과 같은 풍경을 눈에 품게 , 느리게 읽다 보면 얻는 것이 많다. '책과 사귐'도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래서인지, 읽어서 좋은 느낌을 주는 책일수록 읽는 속도는 더 느려지게 마련이다. 마치 좋아하는 연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처럼...


많은 책과 사귈 수가 없으니 되도록 좋은 책을 만나고 싶어 선택이 신중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미식가처럼 말이다. 신중한 선택의 결과는 대체로 좋다. 하루에 한 챕터만 읽어도 마음이 풍성해지고 머릿속은 새로운 생각을 포획한 만족으로 가득 찬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아니 그 책을 아직 안 읽어 봤어요?"라는 말을 더러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읽을 만한 책이 많다는 것은 나에게는 오히려 '든든' 느낌을 준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 아무도 나와 정답게 놀아주려 하지 않을 때, 읽고 싶은 수많은 책들이 있고 노트북 하나, 그리고 커피 몇 잔 마실 돈만 있다면 몇 날 며칠이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노후를 대비한 보험을 하나 든 느낌이다.


'성실'을 사람을 평가하는 항목의 제1번으로 여긴다는 워런 버핏이 본인의 성공의 비결로 여기며 강조하는 습관이 바로 '다독'이라고 한다. 90세가 다된 지금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글을 읽고, 어쩔 때는 젊을 때처럼 하루에 500 페이지가 넘는 책과 보고서를 볼 때가 있다고 한다니 그 말에 신뢰가 간다.


젠장, 이번 생에는 틀린 것인가?


그러나 좌절은 하지 않으련다. 버핏은 수십조의 자산가이고 훌륭한 독서가이지만, 결국 그도 나와 같이 작은 책상에 책 몇 권을 들고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물론 그분은 나와 달리 커피 대신에 체리코크를 홀짝거리고 계시겠지만...

버핏 못잖은 부자로 살 것이다. 마치 한없이 걸어도 끝을 알 수 없는 땅을 가진 목장 주인처럼, 읽어야 할 책 100권이면 평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느림보 독서가로서 말이다. 아참 가끔 글도 써야 하니 속도는 더 느려지겠지.. 후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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