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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May 16. 2021

익숙함은 왜 위험한가?

'끼인 세대' 전성시대를 꿈꾸며

필자는 70년대 중반에 태어나 88년 서울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과 호돌이 마스코트를 기억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미친 듯이 거리응원을 하였으며, 대학 졸업 시절의 IMF와 직장 시절의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몸소 체험한 세대이다. 필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소위 'X세대'로 불리운다. 이른바 '끼인 세대'...


"라떼 이스 호올스"로 말을 시작하시는 선배 분들과 "근데 그건 왜 그렇죠?"라고 되묻는 후배 분들의 중간에서 양쪽 모두를 비위 맞추느라 분주하다. 옛날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트로트도 이젠 제법 흥겹게 따라 부를 줄 알고, 방탄과 블핑의 노래도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 놓고 즐겨 듣곤 한다.


왜 필자 세대는 끼인 세대가 되었을까?


여러 이름 있는 분들께서 깊이 있는 분석과 나름의 학문적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필자는 그저 단순한 이유 한 가지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저 그렇게 살았으니깐 그렇지 뭐.."


'사피 바칼'이라는 천재가 '룬샷'에서 멋지게 펼친 '상전이(phase transition) 이론'에서 처럼, 필자의 세대는 '임계점 상태(Critical Point)', 즉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순간에 있던 입자들과 같이 국가와 사회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온전히 경험한 세대이다. 절대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국가 발전과 효율성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신흥국 국민'으로 살았던 선배들의 시대에서 나고 자랐으며, 개인의 자유와 개성, 공정함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선진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후배들과 함께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끼인 세대'.


그래서 필자 세대는 양쪽 모두가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물이자 얼음이요, 구세대이자 신세대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남자 형제가 있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고,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친구들 중에는 확률적으로 아들만 있는 집이 많았다(심지어 3형제인 집도 셋이나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 보면 대체로 우리 집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친구 어머님들도 우리 엄마처럼 성격이 시원시원하시어(?) 아들 양육에 필수적인 '쌍욕 구사'에 전문적인 소양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가끔 어머님들 중에 남매를 키우시는 분이 학부모 모임에 나왔다가 아들 형제를 둔 엄마들의 말투를 듣고 깜짝 놀라 하셨다는 일화를 한~참 뒤에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필자는 그래서 '남자답다'는 말을 칭찬 중에 아주 높은 평가로 여기며 살았고, '마초적이다 = 남자답다 = 좋은 칭찬'으로 생각하고 사는 유형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결혼을 하게 된 아내의 집은 여자 자매가 있는 가정이었다. 자상한 장인어른께서 딸들이 대학생이 되고 직장생활을 할 때 까지도 '사랑한다~' 하시며 볼에 뽀뽀를 해주시는 그런 분위기의 가정.


신혼 시절, 결혼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먹는 일부터, 집의 살림과 청소, 위생 문제, 이웃과 친구들을 대하는 방법까지...'삶에 대한 스탠다드'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마치 'LP 판과 CD 플레이어의 만남'과 같았으며, 문제 해결은 '1000피스짜리 퍼즐을 배경 없이 맞추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들 둘 있는 집과 딸 둘 있는 집에서 자란 부부의 끝날 것 같지 않던 '심각한 문명의 충돌'은 생각보다 너무 쉽고 신속하게 정리가 되었다.


바로, 필자가 딸 둘의 아빠가 된 것이다.


어디선가 "남자의 야수적 본능은 딸의 탄생과 함께 소멸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딸 둘을 낳아 기른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확히' 딸을 기르는 아빠가 되어 있으며, 우리 집은 내가 어릴 적의 우리 집의 모습보다는 아내의 어릴 적 집 분위기와 닮아있다.


필자가 만일 아들 둘을 낳아 키웠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예상컨대 우리 아내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각자 나고 자라며 경험한 것에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작은 세상'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 소신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내가 나서 자라고 경험한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것이 더 정겹고, 비슷한 '익숙함'을 가진 사람을 보면 신뢰가 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학연, 지연 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하게는 인종, 종교에 대한 차별과 국적, 정치적 견해 차이에 의한 반목도 결국 나의 경험과 생활 기반에 근거한 '익숙함'에 대한 영역으로 생각해볼 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아니리라.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런 나의 마음이 고작 '얄팍한 익숙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일 이  내 마음속의 '익숙함'이라는 것이 결국 '편견'의 다른 이름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익숙함'을 한껏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나 증오의 마음도 조금은 거둘 수 있다. 아들들 틈바구니에서 나고자란 '마초적' 필자가 어느덧 '마초적 세상을 경계하는' 딸들의 아빠가 된 것처럼, 우리 모두는 '나를 둘러싼 익숙함'이 변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든 '내가 아닌 나'로 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와 같이 '끼인 세대'는 오히려 축복을 받은 세대일 수 있다. 두 가지의 극적인 상전이 상태를 경험한 필자의 세대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세대의 독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친구들, 우린 손흥민이야, 양발잡이... 오케이?"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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