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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an 30. 2024

<내 안에 수평선이 있다> 책 리뷰

- 정종숙 시인

<시와 소금>의 남연우 시인 산문집 《내 안에 수평선이 있다가 출간되었다.

2017년 <시와 소금> 등단, 3권의 시집을 펴내시고 2019년 <시와 정신 > 에세이 등단 이후 첫 에세이집이다.



감성 충만한 에세이집 표지를 보는 순간 심쿵, 나는 해초와 파도와 쓸쓸함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바닷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잉크를 묻혀가며 사그락사그락 써 내려가는 아날로그를 아쉬워" 하는 작가는 "감성은 위대한 자연이 격에 맞는 인간에게 주는 축복이다. 감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세상이 알아주건 외면하건 그 스스로 압도적인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것은 물질로 대체되거나 타인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보다 완벽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무의식의 기저층에 자리잡은 밀도 높은 질량의 추억들이 오늘 하루 살아갈 버팀목 구실을 한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에세이집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공감할 만한 추억들이 바닷가 조가비처럼 쌓여있다.


1부에 실린 '순정'이란 제목의 에세이는 흑백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옥돌 선물을 친구 편에 건네주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멀어졌다가 세월 지나 건넨 전화 통화에서 "순정 아이가. 잘 지내라."고 말하는 저음의 경상도 사내! 본 적도 없는 그 남자를 나는 영화 주인공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내가 감독이라면 이나영과 원빈을 캐스팅했을 거 같다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 굴뚝에 기대어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던 작가는 "내 모습이 밝지 못하니까,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해석이 필요했다. 자아를 들여다보던 습관이 나무를 들여다 보게 되었고 자연에 대해서도 해석할 은유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불행이 손톱을 세워 날카롭게 할퀴며 지나가는 순간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아이를 보호하여 무럭무럭 길러 주었다. 무심하면서도 깊은 부모님의 사랑이 지켜 주었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숲을 요리조리 헤쳐 나와 한 송이 들장미를 피우려고 노렸했다."는 남연우 작가!


작가가 자연 속에서 사색하면서 끄집어낸 사물에 대한 사유와 통찰은 예리한 비유의 언어로 빛난다.  1부에 실린 '이성과 감성'은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이 생각날 정도로 예리했다.


작가가 자란 고향 울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울진 바다, 불영계곡, 불영사, 죽변, 후포항에서의 나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한여름 모래 위를 맨발로 걷듯 뜨거워지기도 했다.


공감과 정서적 위로를 언어로 길어오는 능력은 작가에게 부여해 준 신의 선물이다. 남연우 작가는 그 선물을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전화를 걸어 뻐꾸기 울음에 파묻힌 아카시아 향기를 전해 주시는 아버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감성 안테나로 포착하는 능력을 내게 물려주신 아버지", "가을 아침 들판이 선물하는 이슬방울에 감탄하시고, 섣달 새벽 창문에 비치는 샛별을 사랑하시고, 그 곁에 따르는 그믐달을 끔찍이 아끼신다."는 작가의 아버지를 작가도 닮았고 시와 에세이를 사랑하는 우리도 닮았을 거 같다.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있어 여기서 만나지 않았을까?     


작가의 말대로 "오 촉  전구를 켜둔 채 먼 기억 속에서 깜박깜박 정겨운 온기를 내뿜는 에세이, 사유로써 삶을 통찰한 에세이, 자아를 찾아가는 힐링 에세이"이고 덧붙여 감성 에세이! 모닥불 같은 당신에게 권해주고 싶다.


♡ 류근 시인 버전으로  "당신 보시라고."

작가의 아버지 사진과 에세이 '순정' 한 편 올려놓습니다.   

    

[출처] 남연우 에세이집 <내 안에 수평선이 있다>|작성자 정종숙



순정  / 남연우



    징검다리 건너가는 소녀를 만나려고 냇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돌멩이를 던지는 소년의 마음. 이슬 묻은 풀꽃 다발 엮어서 훅 내밀고는 뛰어가는 뒷모습. 들판에 내려앉은 아침 안개이거나 보리순 흔들며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것. 누군가를 향해 좋아하는 감정이 처음으로 내민 새싹. 순정이 아닐까.

     순정은 눈동자에 찍힌 그리움의 발자국이다. 산성도 염기성도 아닌, 리트머스 시험지의 화학적 반응 이전의 감성이다. 순정 그것은 삼월 초순 봄눈과도 같아서 잡으려는 순간 녹아 버린다. 그것은 흠뻑 적시고서 금세 그치고 마는 소나기. 초저녁 여름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순정이 욕망을 잉태하는 순간 더 이상 순정이 아니다. 꽃잎 흩날리는 봄날 버스 타고 멀어지는 유리창 너머 풍경화이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마음 한구석 아리기만 한 풍경화는 멀어   

져야 제멋이다. 놓치지 않으려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이내 후회한다.

    눈물 콧물 액체를 동반하는 그것은 필시 사랑이다. 순정은 일생에 단 한 번, 여리여리하여 손쉽게 다룰 수 없는 감정의 테이프를 끊고 나면 멀어지는 것. 사랑은 재생 가능하다.

   한 아이가 있었다. 시골 정류소 완행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지나서 내리는 바닷가 고등학교로 통학하였다. 교문을 통과하여 운동장을 곧바로 가로질러 교실로 가려면 옆 반 남학생 교실을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날아다니는 항구 도시의 아침 등굣길에는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철썩이는 포말 입자가 섞인 공기 자체도 농촌의 고즈넉함과는 이질적인 성질을 내포하였다.

    신학기 교과서 모서리가 조금씩 책가방에 쓸려 마모될 무렵 교문을 들어서서 운동장을 절반쯤 걸어가노라면 1학년 1반 교실 창문 밖으로 까까머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제의 교실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쟤다, 쟤다" 저들끼리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 단어 달달 외워도 모자랄 시간에 뭐하나 싶어 외면했었다. 그 대상이 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런 일들이 계속되었다. 그런 어느 날 우리 반 남자애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1반에 어떤 애가 주더라면서. 작은 상자였는데 내가 그걸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냉큼 되돌려 주라면서 다시 갖다주었다. 그렇게 몇 번 옥신각신 끝에 그   


상자는 결국 내 손에 머물게 되었다. 심부름한 그 아이도 맹렬해서 갖다주고 싶으면 직접 주라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와서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일곱 빛깔 옥돌이 들어 있었다. 색깔도 예쁘고 방금 파도에 씻겨 나간 듯 반짝이는 모습에 시선을 뺏겨 버렸다. 사실 태어나서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아 본 경험이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때 받은 옥돌이 지금도 내 보석함에 여전히 빛을 내며 담겨 있다.

    그날 이후 주번 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 친구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다. 회장 타이틀을 맡은 그 친구는 키가 크고 듬직한 인상이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고는 선물만 접수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눈길 한 번 안 주는 차가운 내 태도에 그 친구는 한동안 빙빙 맴돌더니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멀어져 갔다. 이성에 무관심한 나를 왜 좋아했던 걸까.  

     세월이 흘러 한창 아이들 양육으로 지쳐 있을 때 전화 한 통 걸려 왔다. 부산에서 친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검색창을 호출하였다. 곧 옆에 앉은 술친구를 바꿔 주겠다고 했다. 이름을 말하는데 옥돌을 줬던 그 친구였다. 음성을 듣는데 이렇게 긴긴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이 말은 꼭 들려주고 싶었다.

    "그때 그 선물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 어린 마음에 너무 예쁘더라." 수화기 너머로 그 친구는 "피식-" 웃음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경상도 남자의 탁한 저음으로 말했다.

    "순정 아이가. 잘 지내라."

     전화를 끊고 아이와 놀아 주면서 계속 생각났다.  

    '순정. 순정. 순정‥ 그게 뭘까?'

    며칠 전 거부할 수 없는 친구들 초청으로 동창 모임에 다녀왔다. 거기서 그 친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작년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소식. 그 말을 전해 듣는데 날카로운 슬픔이 휙-  스치고 지났다. 친구들의 유쾌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보석함을 꺼내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멋지게 보란 듯이 반짝이는데 이걸 준 그 친구는 이미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어쩌다 손에 집어 들고서 그 매끄러운 촉감에 풋풋한 미소를 지었었다.

    그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소중하게 느껴졌던 옥돌들.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17살 소년은 성급하게 밤하늘에 빛나는 옥돌을 뿌려 놓았다. 나는 아직도 순정을 잘 알지 못한다. 동그란 것인지 원뿔형인지 끝없이 나아가는 직선인지‥.

    모습도 형태도 불분명하지만 감각으로 살포시 와닿는 흰 구름 위에 앨범으로 본 그 친구 얼굴을 그려 본다. 무거운 작별 인사는 하지 않을게. 고마웠어. 나 같은 사람 제일 먼저 좋아해 줘서. 너 진짜 용기 있는 소년이었어. 안녕!

      

[출처] 남연우 에세이집 <내 안에 수평선이 있다>|작성자 정종숙



책을 출간하고 나서 평소 알고 지내던 문인들에게 책을 보내주었더니 그중 정종숙 시인의 책 리뷰가 인상적이어서 여기 소개합니다. 표지를 보고 나서 심쿵했다는^^ "해초와 파도와 쓸쓸함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바닷가로 달려가고 있었다"라는 표지 해설을 보며 드는 생각은 '나는 그때 분명 행복했었어!'

유월의 푸른 파도와 쨍그렁 햇빛을 얹은 황갈색 갯바위가 있는 나의 파라다이스, 고향 바닷가를 행복하게 거닐었는데 왜 쓸쓸하게 보였을까?

색이 사라진 바닷가 뒷모습은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 때로는 제3자의 시선이 자신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순정'을 읽으면서 단편영화를 떠올렸고 그 주인공으로 원빈과 이나영을 캐스팅하겠다는 발상에 이르러 "빵" 터졌어요..

만약 그때 다른 물건을 주었더라면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을 텐데

그 소년의 순정은 옥돌같이 맑고 빛나는 순수함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 여태 간직하고 있다는 내 말에 그제야 안심하는 첫마디 "피식~"

아련한 누군가의 첫 마음을 보석상자에 담아두고 지금에 이르러 조금 짐작해 봅니다...


정종숙 시인님, 감사합니다!!


**타이틀 사진은 며칠 전 1월에 핀 꽃잔디를 우연히 발견하고 찍었어요,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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