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희수
강은 길과 외따롭다
그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길은 강을 따라간다
길과 강은 재회한 사람처럼
저만큼 주춤대다 다시 흰 이마를 맞댄다
학이 비익한다
강은 학익처럼 희고 유연하다
강과 길이 합쳐지는 곳
트럭서 내려 강물에 손을 담근다
어디선가 당신도
이 강물에 손을 담글 것이다
한 땀 한 땀 수놓는
저 금사金沙
저물손, 강은 어슴푸레하고 아련하다
_이희수
마루 한쪽 아담한 책장
아이들 책과 내 것 한데 엉켜 있다
가지런히 정리하니 어수선한 마음 가라앉는다
살아오며 정리하지 않은 날
외투 깃에 붙은 실처럼 따라붙던 걱정들
아프던 자리
하얀 백지처럼 남기야 하겠는가
그러기야 하겠는가
그래도 우린 또 아침을 열고
새벽빛 속, 다가와 앉은 저 산
찬 공기 속 깔끔한 이 아침 햇발
거기서 함께 한 젊은 날들
삶을 다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진다고 해도
다시 우리가
겉장 없는 한 권의 책으로
맨 아래 칸, 거기에 꽂혀 있더라도
_이희수
처음엔 그랬어요 처음엔 저 혼자 서지도 못하는 굽은 나
무로 한 세상 곱사등이 등나무임이 우울하였지요 스스로 일
어서지 못하는 저를 위해 사람들은 지지대를 받쳐 주었어요
여름 내내 잎들을 키웠어요 굽은 줄기 안으로 눈을 감고 더디
고 굼뜬 희망을 줄기처럼 키웠어요 살다 보니 꼿꼿한 은행나
무처럼 그늘을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되었어요 등나무 아래 벤
치엔 사람들이 앉았다 가요 잠자리도 앉았다 가고 바람도 쉬
었다 가요 굽은 만큼 잎을 달아 그늘을 만들었어요 살면서 늘
도움만 받는 나도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싶어요 세상에 태어
나 반짝 눈떴을 때처럼 보이는 것 모두 신비하고 내쉬던 숨결
마저도 나무의 숨결처럼 파르스름하던 그때가 생각나요 굽은
나무여 입속으로만 웅얼거리는 그것 이름 붙여 희망이라고
하기로 해요 발 디딜 곳 없이 헛헛하여도 안으로 모든 기운
감추고 바람 속, 허공을 딛는 나무여 등나무여
_이희수
맨 앞은 어미다
어미가 물너울을 밀어내고 있다
새끼들 오종종 어미를 따라간다
어미는 햇볕 속 미세한 소리를 읽어내느라 바쁘다
어미의 성긴 깃에도 새끼들의 숭숭한 깃에도 봄볕 따사롭다
남은 날들이 지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맨 뒤, 아비의 근심은 green zone 밖이다
수리의 발톱도 수면 아래 가물치도 근심이다
맨 앞에서 혹은 맨 뒤에서
어미 물오리처럼 아비 물오리처럼
출렁거리는 세상 위, 강물 건너가는 법을 배운다
내력이다
_이희수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요
이엉 하니 거칠고 굳은살 박인 아버지 손바닥이 보이고
이엉 또 불러보니 잘 마른 지푸라기 냄새
코끝에 달달하고 이엉하고 길게 불러보니 모심기 전
찰랑거리는 논 물 속, 우렁찬 개구리 소리 들리고
쌀방개의 누런 금테가 보이고
추수 끝나 물 빠진 논 살얼음 보이고 빛바랜
사진 같은 철새들 보이고
저물녘 5원씩 들고 산 넘어 철거민 촌
아톰 요괴 인간 보러 앞서 뛰던
영양실조 내 동생의 앙상한 종아리가 보이고
_이희수
강물을 두고 일어서면
문득
잊힌 얼굴 떠오릅니다
오련했던 그대 마음 떠오릅니다
딴에는 살았다고 했지만
저 강물처럼 선선하지 못했습니다
강을 두고 일어서면 회한이 몰아칩니다
까닭 모를 서러움 등짝을 후립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버린 까닭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 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_이희수
구월입니다
내게 있다가 홀연히 잊혀진
별똥별 같은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 이름들 중에는 아직
대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별빛으로 아스라한 이들도 있습니다
함께 지내온 일들이 기억 속에 명멸합니다
혜화동, 밤새워 얘기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떠났습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믿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봄이나 가을에는 당신이나
나의 차례입니다
우리는 모두 별입니다
생생하던 그대 홀연히 떠나도
나 또한 그대 기억에 희미해도
서로가 저편에서 환합니다
잊히고 희미해진다는 것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이미 떠난 그대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울지는 않으렵니다
문학이 없었다면 나는 폐가廢家입니다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한 이희수 시인의 첫 시집을 소개합니다.
물질문명이 난립한 시대
무수한 길의 속살을 헤쳐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냐?
삐까뻔쩍한 쇼핑몰에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잔에 뒷담화를 곁들여 웃고 마시고 떠들고
그렇게 혹해서 한눈을 팔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빠듯한 시간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이희수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외따로이 굽이굽이 동반하는 강과 길
겉장 없는 한 권의 책으로 꽂혀있다 할지라도 소중하게 간직될 당신과 나의 서사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는 곱사등이 등나무
출렁거리는 강물을 건너가는 물오리 가족
이 무렵 추수 끝난 들판 볏짚 이엉에 이르러 앙상한 내 동생 종아리가 보이고
선선한 강물을 두고 일어서면서
삶의 깨달음에 이릅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버린 까닭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 버리지 못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