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숙 시인 시집
_정종숙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치는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성당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건 갈탄 난로 위 도시락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밥을 먹었고
벚나무 아래를 같이 걷던 친구들은 가끔
교실 창밖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막막함을 견디면서
세상과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오래전 일이다
언덕에 올라
첨탑을 바라보며 은빛 종소리를 들었다
백 년 전 쫓겨 온 신도들이 구운 벽돌에는
믿음이 굳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스미는 빛을 떼어먹으며
신은 믿지 못했지만
사람은 믿기로 했다
믿지 못하면 속기라도 해야겠다
너를 위한 벽돌을 구워야겠다
_정종숙
동쪽으로 십 킬로쯤 달려와
살게 된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나뭇가지에 쌓이는 걸 보면서 이삿짐을 풀었다
막막한 걸음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고 녹여주는 곳이 있어
세상은 얼어죽지 않았다
넓은 인도에는 띄엄띄엄 벚나무가 있고
가게 앞에는 옷을 입은 강아지가 있다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있는
빨간 벽돌집 마당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는 기쁨이 있고
고흐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처럼
여름밤 치킨집 앞에는
삼삼오오 맥주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정겨운 소란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은행나무 아래 둥지 튼
공중전화 박스에 풀풀 눈이 들이치면
괜히 전화 걸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오래된 집에 푸른 물을 들여 꽃집 차린 아가씨가
화분에 물주는 뒷모습과
팝송 틀고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뒷모습은
뒷모습의 반경을 생각하게 한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빛을 내고
창가 불빛이 지붕을 기댄 집들을 위로한다
동쪽으로 걸어가면 나무숲과 기찻길이 볕을 모으는
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살짝 기운 지구와 오래 살고 싶어진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듯이 그렇게
_정종숙
숱한 표정이 묻어 있는
뒷모습을 숨기고 싶어서
소심하게 걸었다
육교만 남고
고무줄과 단추를 파는 노인의 얼굴을
지나칠 때마다
춥게 걸었다
뒷모습을 들키지 않은 채
수많은 육교를 건넜다
사유상 뒷모습에서
흘러내리는 숨을 들이마셨던 날
춥게 걸었던 날이 깨어나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먼 데를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끌고 가는 길고 긴 곡선의 길에
당신이 풀 수 없는 망망한 것들의 목록
먼 데는 멀어지고 있었다
_정종숙
죽도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미역 줄기가 실신해 있었어
바다에 꽂힌 막대기가 아파보였고
돌에 앉아 한없이 붉어질 때
바닷물이 왔다 갔어
멀리 갔다 돌아오는 흐름
선명한 게 좋았는데
이제는 불투명한 것도 좋아
우리 갈래가 조가비만큼 많다는 걸 알고
촛불을 꼭 같이 끄지는 않아
사방이 어두워져도 서서히 보이지
그 속에 너도 있고 미루나무도 있고
곁에 없다는 것
피어야 할 꽃이 피지 않는 것
바라보는 노을 끝에 그 사람이 걸려있는 것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산호초를 줍는 저녁
흐름 따라
우리는 멀리 가고 있더라
_정종숙
겨울 언덕은 멀었다
얼어붙어도 가고 싶었다
산은 멀지 않았지만 가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는 몸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었고
멀어질수록 그리운 건 어머니였다
미움은 멀리 두고 싶었고
사랑은 멀어져도 밉지 않았다
멀어짐으로서 또렷해지는 숲이 있었고
멀어져서 가까워지는 들이 있었다
멀고도 가까운 것이 내게 손 내밀었고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
살게 했다
멀리 달아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둥지를 만들고
날마다 장작불을 피우기 위해
나는 멀리 간다
_정종숙
그날도 햇볕이란 햇볕이 다 모였다
조화 파는 집에서
흰 꽃 파란 꽃 한 다발 묶어
따뜻한 묘지 위에는 생화 놓고
유리상자 사진 옆에는 조화를 놓았다
공원묘지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 먹으며 안부를 묻는
뜨겁게 살다 간 사람을 기억하는 오랜 방식
이날이라도 와야
지은 죄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모였다
세상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똑같은 말을
수십 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 놓아주고
멀리 산자락 바라보는 수줍은 방식
어느 순간부터 떠난 사람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산 사람 이야기만 하면서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깊숙이 숨겼다
묘지의 풀 한 줌 뽑고 내려오면
우릴 기다리는 잔디 너른 미술관
풀지 못한 마음이 잔디 위로 굴러가고
우리는 미술관 옆 카페에서 열상을 식히면서
일 년 동안의 안녕을 주고받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정종숙 시인의 첫 시집 <춥게 걸었다>를 소개합니다.
화사한 볕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추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봄여름 가을 내내
저편 음지에 서서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지에 서 있어도 추운 사람들..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그렇게 한기에 떠는 사람들을 보듬는 따스한 시선들이 곳곳에 스며 있어요.
육교에서 고무줄과 단추를 파는 노인,
눈 쌓인 침엽수 그림을 팔러 온 러시아 유학생,
황간역 철로 변에서 신발이 벗겨진 채 발견된 종원이,
차비를 꿔 달라고 다가온 추레한 젊은이,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1층 시인의 집에 모시고 온 휠체어 탄 노부부.
시인은 그들을 만나러 멀리 갑니다.
우리 가까이 살지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그들에게
장작불을 피우면서
따스한 온정을 기꺼이 나눠주고 건네줍니다.
"누구를 위해서 울 수도 있어야 사람이지
울어서 삶이 어려워진다해도"
"신은 믿지 못했지만
사람은 믿기로 했다
믿지 못하면 속기라도 해야겠다
너를 위한 벽돌을 구워야겠다"
사람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굳건히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 말이 계속해서 화두를 던집니다.
누구를 위해서 울어도 봤고
믿고 또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 경주 터미널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지갑을 분실했다며
차비를 빌려달라고 하였어요.
그럴 수 있겠다 싶었고 처지가 딱하여 지폐를 선뜻 내어주었는데
나중에 사기란 걸 알았지요.
연민으로부터 싹튼 온정이 그 순수함마저 훼손하는
돌팔매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사람,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믿습니까?
탈속한 성인처럼
그래도 사람을 믿어 보라고
간곡히 부탁하듯
마음을 다스리고 실천하는
시인의 마음 씀씀이에 솔깃해지고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인 걸까요.
"바라보는 노을 끝에 그 사람이(을) 걸"어놓고
"사랑은 멀어져도 밉지 않"은
사랑,
그 사랑이 인류애로 노을처럼 번져가는
찬 바람에 어깨 시린 이 가을 품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