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그런 거예요

_이경옥 시집

by 남연우


몽돌의 기도

이경옥



청사포 해변엔 검은 몽돌만

해안선을 따라 달그락거린다


바다가 오래도록 쓸고 닦은 돌멩이

늙은 수녀의 묵주처럼 반들거리고


차륵, 차르륵 가만히 듣다 보면

아직 덜 닳은 기도 새어 나온다


그 곁에 한참 앉아 있으면

맨들맨들 다듬어지려나


심장에서 모난 염치를 꺼내

물 위에 가만히 내려놓는다


차르르 차르르 파도가 와서

나를 문지르고 간다





이런 사람

이경옥



나는 웃을 수 있는 사람

짠 내 가득한 주변을 그러모아

가난을 꼼꼼히 돌보며

조금씩 웃는 사람


나는 울 수도 있는 사람

부글거리는

분노와 슬픔을 감춰 두고

혼자서 훌쩍이는 사람


멀리 가지 못하는

경직된 팔다리에

온갖 기원들 주렁주렁 달아 놓고

당산나무처럼 한자리에서

가지만 흔드는 사람


기타 줄은 녹슬고

음정에 흠집이 생겨

삐끗 엇박자를 내는

나는 음악을 잊은 사람


순간순간 깜깜하고 때론 너무 환한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여러 겹으로 숨겨진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





을숙도 사용법

이경옥



2월부터 이곳에 오기 시작했어요 바람이 뒤적이던 마른

갈대숲이 있고 가끔 고니들이 만들던 구애의 리듬이 출렁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고독하지도 자주 우울하지도 않지만 숨은 그림

찾듯 물결을 넘기면서 나를 아늑하게 놓아두는 시간이 참 좋군요

동백꽃 피어나는 둔덕쯤에 샤먼의 술사를 세워두고 오래된

시간 속으로 떠나보기도 합니다 지금은 쉰아홉을 살아내는

중, 부족한 걸 구걸할까요? 가진 걸 나눠 줄까요?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 내가 싫어지는데 고니가 사나운 새라는 걸 알고

잠시 안심이 되기도 해요 새들이 두고 간 소리에 귀를 담가보는

을숙도는 나를 가만히 놓아둘 수 있는 방입니다

당분간 이곳이 나의 19호실*입니다




*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




엄마가 뜨고 염소가 풀다

이경옥



엄마가

꾸벅잠 쫓으며 엮은

빨간 스웨터


그해

나는 동백꽃보다 더 붉었다


염소 우리 옆에

걸쳐두고 숨바꼭질했다


옷 챙겨 든 저녁

팔 한 짝이 너덜너덜 풀어졌다


색깔 다른 짝짝이 팔로

사 학년이 되었다




image.jpg



가끔 얼굴 보고 지내는 이경옥 시인이 <믿음이란 그런 거예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였다.

여자 나이 쉰아홉,

쉰 고개를 넘어가는 일은 숨이 벅차다.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온다.

산마루에 걸터앉아 한숨 돌리노라면 산새의 눈초리에 안심이 되고

기쁨이 샘솟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있다.

다 큰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의 손길을 요구하고

접경지를 특권처럼 오락가락한다.

서로의 각방에서 남편은 멀어져 가는 사람

여자는 고독이 담긴 쓸쓸한 둥우리에서 찬밥을 말아먹는다.

몇 살 더 앞서가는 그녀의 시편들이 나에게 더 공감이 되는 이유이다.


청사포 해변에 쪼그려 앉아

<몽돌의 기도>를 듣는 일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기도는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만 열려있기 때문이다.

'늙은 수녀의 묵주처럼 반들거리'는 돌멩이는

얼마나 수많은 파도의 뒤척임을 견뎌야 했을까.

때론 감미로운 속삭임으로

때론 어깨를 후려치는 죽비 같은 아픔으로

자신의 모를 닳게 하는 그것, 시간이 응축된 세월의 무게 아닐까.

'심장에서 모난 염치를 꺼내'

'나를 문지르고 간다'

몽돌 앞에서 성찰하는 시인의 기도가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나는 조용히 웃는다.

나는 슬픔을 감춰둔다.

나의 감정이 직선으로 새 나가거나

누군가에게 들키는 걸 싫어한다.

쉰에 이른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저울질한다.

그래야만 어른이니까.

반평생을 제대로 산 보증서이니까.

그럼에도 내 안의 언어를 소통하고 싶고

공감을 나누고 싶고

위안을 얻길 바란다.

그 언어가 꽤 괜찮은 창의력으로 날개를 단 언어라면 더더욱 그렇다.

'멀리 가지 못하는 경직된 팔다리에/ 온갖 기원들 주렁주렁 달아 놓고/

당산나무처럼 한자리에서/ 가지만 흔드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에서 착안한

19호실은 '나를 가만히 놓아둘 수 있는' 을숙도에 있는 방이다.

'마른 갈대숲이 있고 가끔 고니들이 만들던 구애의 리듬이 출렁이기도'하는

그 방은 혼자만의 방이고 나를 숨 쉬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방이 아닐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방,

밥을 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빨래가 쌓였다며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면서,

내가 잊고 있었던 나를 여자로 다시 살게 하는 방,

나도 그런 방이 갖고 싶다.


동백꽃보다 더 붉은 유년의 시인이 부럽다.

두 볼이 빨간 소녀는 엄마가 짜 준 빨간 스웨터를 입었다.

숨바꼭질을 한 아이는 한겨울에도 땀이 난다.

스웨터를 벗어서 염소 우리에 걸어두었다.

심심하던 흑염소 눈에 그 빨간색이 오뉴월 따먹는 꽃처럼 보였다.

뿔을 들이밀었다.

저녁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무렵

아이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팔 한 짝이 너덜너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연을 들은 엄마는 색깔이 다른 실로 소매 한쪽을 마저 떠주었다.

색이 다른 짝짝이 팔이 부끄러웠을까?

사 학년이 된 소녀는 부끄러움보다는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 좋아서

빨간 스웨터를 오래도록 입고 다녔을 것이다.

엄마가 뜨고 염소가 푼 유년의 기억이 오래오래

시인의 가슴을 데웠을 것이다.

<엄마가 뜨고 염소가 풀다> 이 시를 짓게 한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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