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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Dec 19. 2023

아주 그럴싸한 말

가족들은 집밥을 좋아하지만 난 남의 밥이 더 좋다. 

요리를 하기 싫었던 어느 날 가족들에게 물었다.


“오늘 뭐 먹을래? 딘 샤오 펭 갈까?"


가족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못 알아들었나 싶어 약간의 설명을 덧붙어 상기시켜 본다. 


“거기 샤오롱바오 워낙 유명하잖아. 한번 가보자!”


“엄마, 딘 타이 펑 말하는 거야?"



둘째의 말에 순간 웃음이 터졌다. 딘 사오 펭을 말하던 그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는데 듣고 보니 딘 타이 펑이 맞았다. 그 유명한 Din Tai Fung을 어떻게 저렇게 틀리게 말했을까? 덩샤오핑과 샤오롱바오 때문이었을까? 


결혼을 하고 나서 시어머니댁에 갈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4개 국어를 하는 남편과 시동생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각자의 파트너까지 초대를 하면 그 말들을 알아들으려고 집중을 하다가 어김없이 두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공인 불어는 대충 알아듣고 미소로 답하는 수준으로 버티기로 했고, 영어와 독일어는 통역 번역을 할 수 있는 고급 수준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내 의지를 피력하고 원하는 바를 얻어내며 심지어 싸우기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인치고 언어를 세 개나 하면 많이 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하나의 언어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간다. 국적 무관하고 먼저 생각나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한 문장을 만들고 심지어 신조어를 창조한다. 


<니모를 찾아서>의 도리처럼 뒤돌아서면 까먹는 기억력도 문제지만 글자를 대충 읽고 제대로 이해했다 생각하는 오만함과 만사가 귀찮아 고유의 발음을 말하려는 노력보다 한국적 발음으로 그냥 뱉어버리는 나의 게으름도 가족 간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 아마 나의 가족들은 하루하루가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한국에 사는 친구가 둘째 아들과 함께 싱가포르에 놀러 왔다. 평소에 별로 잘 돌아다니지 않아 일 년 넘기 싱가포르에 살았어도 안 가본 곳이 많았다.  

친구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시끄러운 번화가보다는 조용하지만 분위기 있는 동네를 찾다가 Duxton Hill의 Latteria Mozzarela Bar에 가기로 했다. 다양한 Mozzarella와 Burrata 치즈를 선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몇 시에 만날 지를 정하려고 친구의 일정을 물었다.


"저녁 먹고 슈퍼 트리 보러 베이 바이 더 샌즈에 간다고 했지?" 


카톡에 쓰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감지했지만 바른 지명은 생각나지 않는다.

슈퍼 트리를 핵심어로 빠르게 서치를 해서 '가든스 바이 더 베이'라고 고쳐 쓴다. 

딘 샤오 펭의 충격도 아직 가시지 않은 시점에 이번엔 베이 바이 더 샌즈라니.


레스토랑 Latteria Mozzarela Bar는 참 예뻤다. 크리스마스 조명의 야외 좌석도 예뻤고 우리가 주문한 다양한 메뉴들도 모두 맛있었다. 다만 기대했던 조용하고 편안한 유럽풍 분위기에서의 식사는 하지 못했다.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음식 맛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상하이에 살았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의미라나. 라면을 먹을 때 소리 내서 먹어야 더 맛있다는 우리의 정서와 통하는 것일까.



저녁 식사를 끝내고 친구가 슈퍼 트리를 보러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르려다 묻는다.

"언니, 내가 어디 간다고 했지? 왜 그 말이 생각 안 나?"

'베이 바이 더 샌즈'를 한번 들은 이상 똘똘하던 친구마저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다. 내 증상은 바이러스 수준이다.


남편은 나에게 Verbal Bug이라고 별명을 붙여줬고, 나의 실수를 제일 잘 아는 친구 하나는 "언니, 이번엔 심지어 그럴싸하기까지 하네."라며 위로를 보탠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언젠가 싱가포르에 오게 된다면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 '마리나 베이 샌즈'를 짬뽕으로 말하는 증상을 겪게 되리라. 그것도 아주 그럴싸하게. 


그래도 괜찮다. '베이 바이 더 샌즈'를 얘기하고 저도 모르게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향하거나 '마리나 베이 샌즈'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곳 모두 싱가포르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니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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