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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타상, 오겡끼데스까?

by Yujin Kim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던 시절 윌리엄스 소노마(Williams Sonoma)라는 주방용품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화려한 식기들과 세련된 커트러리들이 가득 차 있었고, 쓸모 있는 주방 용품들과 무용하지만 아름다움 장식품이 어우러져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1950년대 프랑스 파리에 여행을 갔던 척 윌리엄스는 파리의 고급 접시들을 보고 감탄하여 소노마에서 가게를 열게 되었고 그것이 윌리엄스 소노마의 시작이다. 이 브랜드는 로고 디자인에 파인애플을 사용했는데, 파인애플은 ‘환대와 우정’을 상징한다고 했다. 미국이 식민지이던 시절 선장들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 담장에 파인애플을 꽂아 두고 이웃들에게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방문객들을 환영한다는 표시로 사용을 했다고 한다. 초대문화가 발달된 미국에 살면서 요리에 관심이 많았고, 독일 친구들을 초대할 일이 많았던 내가 윌리엄스 소노마에 자주 들른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곳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식사 준비를 위해 아름답게 식탁을 차리고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는 ‘환대’의 정신이 있었다.


“환대’에 대한 나의 생각은 사실 미국에 살았을 때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환대를 받은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난 어김없이 일본인 친구 켄타와 그의 부모님을 떠올린다. 1998년 대학을 마치자마자 캐나다 밴쿠버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어학연수는 대학시절 내내 계획했던 나의 꿈이었다. 한국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러가 비쌌기 때문에 미국보다 비용이 조금 저렴한 캐나다행을 택했다. 영어 수준을 빨리 향상하기 위해서 첫 석 달을 캐나다 아줌마 모린의 홈스테이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켄타를 만났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던 켄타는 여자친구를 따라 밴쿠버에서 단기 어학연수를 하러 왔고 나보다 먼저 모린 아줌마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나의 영어 회화 수준은 기초 단계를 가까스로 벗어난 수준이었고, 켄타의 영어 수준은 밴쿠버에서 몇 달간 어학연수를 이미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미비한 수준이어서 우리는 깊은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Hi, how are you?” 정도의 영어에서 “What did you do today?” 로 넘어가면 급하게 필요한 단어를 찾고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좌우로 굴러가는 켄타의 빠른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대화의 수준이 아니 대화의 길이가 조금 길어졌을 때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세탁기는 일본어로 뭐라고 해?”

“센타끼.”

“ 와 정말? 한국어와 아주 비슷하네!”

알고 보니 일본어와 한국어에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상당히 많았고, 나와 켄타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비교해 발음이 비슷한 단어를 찾아 손뼉 치며 기뻐하는 수준의 대화를 하곤 했었다. 일본어에 관심을 보이는 나에게 켄타는 일본어 그림 사전을 선물해 줬는데 그 사전은 우리 집 책장에 소중히 잘 보관되어 있다. 심도 있는 대화를 시도하던 어느 날 라면이 어느 나라 음식인지 대화를 하다가 내가 라면이 한국 음식이라고 우겼고, 황당한 얼굴의 켄타는 라면이 일본 음식이라고 반박을 했다. 점잖은 켄타 마저 얼굴을 붉히게 만든 무식한 한국 여자의 주장에 켄타는 반박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으나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조목조목 설명을 하지 못하고 아니라고만 외쳤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말도 안 되게 우겼는지 창피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먼 훗날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우길 것을 예상하고 남이 말도 안 되는 사실로 우기면 어떤 감정이 드는지 미리 체험하게 해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우리는 얄팍한 대화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숙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서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동지였다.

홈스테이에서 석 달을 살다 시내로 집을 옮기면서 켄타와는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당시에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기도 했고, 졸업을 하고 어학연수를 간 거라 최대한 빨리 6개월 만에 고급과정까지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켄타도 반년 정도 더 지내다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켄타와 나는 이메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냈는데 회사에서 친해진 동료와 대학 친구 이렇게 셋이서 일본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켄타에게 전하자 켄타가 부모님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켄타와 켄타의 부모님을 방문할 만큼 우리가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하루의 숙박비라도 절약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이후 난 그와 그의 부모님이 보여준 조용하지만 품격 있는 그날의 환대를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2월의 어느 날, 춥고 고단했던 도쿄 여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켄타가 살고 있던 카마쿠라에 도착했다. 켄타는 친절하게도 역으로 우리를 마중 나왔고, 켄타의 차를 타고 켄타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켄타의 부모님과는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는 게 느껴졌고, 일본의 비싼 물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회로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안면도 없는 한국의 이방인을 위해 차린 식탁에는 식기와 음식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어두운 조명이 무색하게 정성으로 빛나는 식탁이었다. 배가 고팠던 여자 셋은 체면을 어디론가 여행 보낸 듯 식탁에 차려진 회와 기타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잠을 잘 시간이 되어 우리를 안내한 방에는 두꺼운 요와 이불이 세 채 깔려있었는데 켄타의 어머니는 전기로 따뜻한 바람을 넣으면 사람 몸 만한 핫팩이 부풀어 오르는 기계를 갖고 오셔서 요와 이불 사이에 넣고 우리의 이부자리를 데워 주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불을 데워주는 기계를 보게 되어 신기했고, 그날의 이부자리를 준비해 주시던 어머니의 우아하면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바람을 품고 있던 두꺼운 이불이 차가운 공기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방패처럼 따뜻하게 막아줬던 그날 밤 나는 귀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편안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초대’에 대한 얘기를 남편과 함께 나누다 켄타와 켄타 부모님의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링크드인(Linkedin)에 검색을 해 보니 다양한 켄타들이 주르르 검색되었고 나는 많은 켄타 중에서 옛 친구 켄타의 얼굴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켄타에게 이메일로 연락도 해 보고 링크드인에 검색을 해도 나의 켄타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는데 남편의 검색 한 번으로 반가운 켄타를 찾게 되다니 신기했다. 언젠가 일반인에게도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켄타를 찾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 기회가 생기는 걸까? 링크드인에서는 일단 친구 신청을 해 놓고 페이스북에 같은 이름으로 조회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켄타? 1999년 밴쿠버 모린 아줌마 홈스테이에서 잠시 함께 살았던 한국인 유진을 기억하나요? 제가 친구들과 일본으로 여행 갔을 때 저와 친구들을 부모님 댁에 초대해 주셨죠. 그날 받았던 따뜻한 환대를 저는 여전히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날 세상 어느 누구보다 VIP처럼 귀한 대접을 받았거든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어요.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현재 남편, 아이들 둘과 함께 싱가포르에 살고 있어요. 혹시 켄타나 켄타 가족이 싱가포르에 여행을 오게 된다면 저도 그날의 고마운 마음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메시지를 읽게 되면 연락해 주세요. 밴쿠버 홈스테이의 인연, 유진.”


살면서 고마운 인연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 유독 켄타를 찾고 싶은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고마운 인연들은 가까운 관계여서 서로를 도와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아닌 경우에는 적어도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라 호의를 언제든지 갚아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켄타는 달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지애가 있었지만 언어의 장벽으로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는 게 특별했다. 게다가 이 십여 년 전의 인연이라 연락처를 알 수가 없어 고마움을 전할 방법이 없다는 게 더욱 안타까웠다.


켄타의 연락을 기다린다. 내가 받은 누군가의 마음을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음에 품어 둔 호의를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게 베푼다면 그것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 캐나다 홈스테이의 인연이 내 마음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오래전부터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었다고. 우연이 만든 아름다운 인연들이 하나 둘 자산처럼 쌓일 때 지키고 가꾸어가는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태어난 김에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은 그런 관계에서 오는 것 같다. 진심으로 인연을 가꾸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건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사는 곳이 자주 바뀌어 만남과 헤어짐을 너무 당연하게 겪는 나의 아이들이 살면서 지켜나갈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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