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너랑 통화하고 싶으시대.”
한국에서 언니가 전화를 했다.
“작가님, 잘 지내고 있어요?”
전화기에 “아빠?”하고 부르니 아빠가 묻는다. 아빠가 나에게 작가님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이라 웃음이 났다.
“큰 딸을 보니 작은 딸이 생각나네.”
오랜 서울 생활에도 그대로 있던 아빠의 무뚝뚝한 경상도 색은 나이와 함께 바래는 중이다. 아빠의 목소리가 편안한 걸 보니 건강하신 듯했다. 1940년생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제 건강이다. 얼마 전 남편이 출장에서 사 온 마카다미아 넛츠를 보고 아빠 생각이 났었는데 내 마음이 전해졌던 것일까?
하와이안 호스트 마카다미아 너츠 초콜릿은 나에게 특별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 아빠는 하와이안 호스트 마카다미아 너츠 초콜릿을 사 오셨다. 해외 출장이 특별하던 시절이었다. 큼직하고 고급스러운 모양의 초콜릿 속에 마카다미아 너트가 두 개씩 들어있었다. 마카다미아 너트가 그렇게 고소하고 맛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맛과 식감이 기가 막혔다. 한 박스에 초콜릿이 4개씩 딱 4줄만 들어있기 때문에 형제끼리 서로를 감시하며 아껴 먹었다. 삼 남매가 공평하게 나눠 먹고 남은 한 개는 가위 바위 보의 승자가 차지하거나, ‘니들만 입이냐?’라고 가끔 관심을 보였던 엄마가 드셨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어릴 때 하와이 마우이섬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상점마다 널린 하와이안 마카다미아 너츠 초콜릿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하와이에서 만난 아빠 같았다. 초콜릿을 보자마자 아빠가 떠올랐고, 고민 없이 두 박스를 샀다. 하나는 바로 먹고 하나는 집으로 싸 가고 싶었다.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족들에게 들려줬다. 내 추억이 가족들의 추억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신도 출장 다녀올 때 항상 사 오는 초콜릿이 있으면 좋겠어. 내가 아빠를 기억하듯 아이들도 그 초콜릿만 보면 당신을 기억할 수 있잖아.”
아이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제안을 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편이 아이들과 공유할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에 좋은 전략 같았다. 비록 엄마가 계획한 전략적 추억일지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 준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유럽 출장을 다녀올 때면 어김없이 린트사의 린도어 초콜릿을 사 왔다. 내가 유럽에서 처음 맛보고 반해버렸던 스위스 초콜릿이었다. 딱딱한 밀크 초콜릿 볼 안에 부드러운 초콜릿 크림이 들어있어 동그란 초콜릿을 깨어 물었을 때 입 안에 퍼지는 부드러운 달콤함이 인상적이었다.
“아빠, 기억나세요? 예전에 출장 다녀오실 때 대한항공에 기내에서 사 오셨던 초콜릿. 하와이안 마카다미아 너트 초콜릿이요.”
“아니, 기억 안 나는데?”
“남편이 출장에서 다녀오면서 그 초콜릿을 사 왔는데 아빠 생각이 났어요. 그렇잖아도 그거 얘기해 드리려 전화하려고 했는데.”
아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출장 갔을 때 따로 쇼핑을 할 시간이 없어 아빠는 비행기에서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골랐을 것이다. 출장을 자주 간 것도 아니었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니 기억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함께 공유하던 하나의 기억이 아빠에게는 초콜릿처럼 녹아버렸고, 나에겐 고소한 너트처럼 남았다. 나는 자랄 때 아빠가 제일 관심을 두지 않던 둘째 딸이었지만, 아빠와의 사소한 일상을 제일 많이 기억하고 있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들의 어떤 시간까지 가 닿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먼 훗날 아이들은 어떤 순간에 나를 기억하게 될까? 엄마를 기억해 낼 아이들 각자의 순간이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