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해외생활
집을 나섰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하는 아침 산책은 싱가포르와 친해지려는 나의 몸짓이며 건강을 챙기려는 몸부림이다. 덥고 습한 여름의 나라에서는 움직이는 게 고역이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 그런 체질도 통하지 않는지 '비 오듯이 땀이 흐른다'는 말을 이곳에서 몸소 체험한다. 더우니 무언가를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가만히 집에 있는 날들이 많았다. 움직이지 않으니 몸은 점점 둔해지고, 갱년기 마저 시작되는지 살도 찌기 시작했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왜 부지런하지 않은지 이곳에 살면서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집에서 출발해서 Holland Green Linear Park을 따라 걷다가 정글 사이에 난 길을 거쳐 Old Holland Road를 만나면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튼다. 같은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면 4.5km 정도를 50분 이내에 걸을 수 있다. 걷다가 이쁜 꽃이나 신기한 동물들을 발견하면 이름을 검색해 보거나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지체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중요하지는 않다. 이곳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게 시간이다.
싱가포르에 산 지 어느덧 일 년. 지난 3월부터 한국의 지인이 운영하는 낭만러너스 클럽 걷기 모임에 참여했다. 100일 동안 일주일에 5번씩 걷고 온라인으로 인증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회원들과 같은 시기에 함께 한다는 구속력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매일 밖으로 나가는 동기가 되었다. 산책을 정기적으로 나가다 보니 동네 강아지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거대한 나무들에 둘러 쌓인 산책길. 무슨 용무로 그리 바쁜지 나뭇가지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다니는 다람쥐들. 눈 주위에 조로처럼 까만 띠를 두른 새도 날아다닌다. 아침 산책을 할 때 자연이 보내는 소리가 좋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나는 그렇게 산책을 하며 자연의 일부가 된다.
여름을 지내고 9월에 낭만 러너스 클럽의 차기 모임이 결성되었다. 지난 기수를 6월에 마치고 나서 혼자서 걸어보려고 했지만 걷지 말아야 할 핑계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역시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재미와 효과가 있어 100일간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낭만 러너스 클럽 7기는 2023년 9월 18일부터 12월 27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자주 다녔던 동네 정글 길을 지나가는데 높은 나무 가지에 올라가 있는 수탉과 그의 여자 친구들을 발견했다.
닭이 푸드덕 거리며 짧은 거리를 뛰어오르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나뭇가지에 올라가 있을 만큼 점프 실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닭의 재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싱가포르 닭들이 특이한 것인지 모르겠다. 싱가포르에 와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도시 한복판에서도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닭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루는 신호등 앞에 서 있던 수탉이 신호가 보행 신호로 바뀌자 신호에 맞게 앞장서서 길을 건너는 것을 보고 한참 웃은 적이 있다. 머리 좋은 닭을 만난 이후 이번에는 점프 실력이 좋은 닭들을 만남 셈이다.
'인간아, 이 참에 너도 네 한계를 시험해 보지 그러니?'
위풍당당해 보이는 수탉이 나에게 한마디 던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숲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작은 원숭이가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 반년 동안 같은 길을 수없이 걸었는데, 원숭이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너무 귀엽고 신기해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여자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Look, there is a snake!"
원숭이가 바라보는 방향에,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커다란 뱀이 나뭇가지를 타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특종이었다. 반년 간 동네 정글숲을 걸었다면 지금까지 저런 뱀을 한 번쯤은 만났어야 했다. 특종을 찾아 헤매는 기자들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용감한 기자처럼 무서운 마음을 뒤로하고 핸드폰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동네 정글에 이런 커다란 뱀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아니, 내가 그런 뱀을 봤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도시 정글에 사는 나의 모험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 같아 흥분이 되었다.
오후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 기자가 물고 온 특종을 보여주니 동물박사인 아들이 특히 관심을 보였다. 나의 산책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들은 심지어 주말에 나를 따라 산책도 가겠다고 했다. 큰 뱀을 직접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엄마, 저 뱀은 Reticulated Pyton이라고 해."
파이톤?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파이톤이라니. Reticulated Pyton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그물무늬 비단뱀이라고 한다. 동남아시아 열대우림지역에서 사는 뱀 중에 가장 긴 뱀이라고 한다. 얼마 전 한국 영주에서 발견되었다는 뱀과 비슷한 종인 것 같았다.
동네 정글을 걷는 것이 좋았다. 사람들이 산책을 할 수 있게 길을 내어 놨기 때문에 진짜 정글 숲을 헤치고 갈 필요도 없으면서 가끔 신기한 새나 동물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거진 수풀에서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동물의 움직임을 쫒았다. 대부분 다람쥐나 이름 모를 새들이 만들어 내는 부석거림이지만 이젠 더 큰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다음날 같은 길을 걷는데 약간 긴장이 되었다. 특종을 잡았다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정글이 품고 있는 위험이 가까이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동물을 만날까 하는 호기심보다는 또 어딘가에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신기한 동물이지만 결코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은, 특히 물리고 싶지는 않은 동물이었다.
긴장을 하며 걷는 중에 앞집에 사는 마르셀리나와 강아지 졸라를 만났다. 전날 이곳에서 그물무늬 비단뱀을 만났다고 얘기하니 정글로 들어가면 코브라도 있다고 한다.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니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코브라를 위협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뱀도 있고 코브라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강아지 졸라와 씩씩하게 정글로 들어가는 마르셀리나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물무늬 비단뱀은 정글 어딘가에 살고 있다.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내가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고, 직접 실체를 보고 난 이후에 위험을 느낀 것뿐이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뱀의 존재를 모르고 산책을 즐긴 과거와 알아버린 현재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어져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모르고 살면 마음 편한 일들이 참 많다. 몰라서 행복한 것이라면 포장된 행복이 아닐까?
우리는 살면서 어렵고 위험한 순간을 수없이 맞닥뜨린다. 내가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닥칠 운명이라면 겪어야 할 일은 반드시 겪게 되어 있다.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배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특종을 찾듯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자세. 그것이 해외생활을 슬기롭고 즐겁게 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