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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도 괜찮을 행복한 착각

투로는 내 친구

by Yujin Kim

거실 한편에 빨래가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2주간의 영국 여행에서 제일 많이 얻은 것은 여행지의 멋진 사진도, 행복한 추억도, 새로운 경험도 아닌 공포스럽게 쌓여있는 빨래였다. 여행가방 4개에서 쏟아져 나온 빨래는 빨래통 하나를 꽉 채우고도 넘처나 거실을 다 삼겨버릴듯 했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날부터 하루에 4번씩 세탁기를 돌렸다. 색깔 별로 세탁물을 구분하여 세탁기에 넣고, 세탁이 다 된 빨래는 건조대에 널어 햇빛에 말렸다. 습한 날씨 때문에 빨래가 잘 안 마를 수도 있기 때문에 건조기에 말릴 수 있는 옷들은 온풍으로 재빨리 말려버렸다. 다 마른빨래는 개거나 다린 후 누구의 것인지 사람별로 구분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식구들이 거실에서 방으로 올라갈 때 각자 알아서 자기 빨래를 가져가도록 구분해 놓은 것이었다. 여행을 마냥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여행을 떠나기 전 집을 치우는 것도, 묵을 곳, 먹을 곳, 볼 곳을 검색하는 과정도, 갔다 와서 엄청난 양의 빨래를 하는 것도 다 귀찮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2주간의 봄방학을 마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주말 내내 빨래 사태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한숨을 돌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침 산책을 나갔다. 내가 즐겨 가는 산책로로 들어섰을 때 멀리 산책을 하고 있는 투로(Turo)가 보였다.


투로는 내가 아침 산책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만난 강아지였다. 내가 사는 동네는 주택이 많은 동네여서 그런지 개들의 천국처럼 개를 키우는 집이 상당히 많았다. 한국의 아파트와 같은 집을 싱가포르에서는 콘도라 부르는데 콘도에서는 개 한 마리, 주택에서는 개 세 마리까지를 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산책을 다니다 보면 정말 많은 종류의 개를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반려인이 아닌 가사도우미(헬퍼)들이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을 시킨다는 것이 다른 나라와는 달랐다.


투로는 정말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처음 만난 날에도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고, 팔짝팔짝 뛰면서 나를 반겼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투로의 이름을 기억해 뒀다. 두 번째로 만났던 날, 내가 "투로~" 하고 부르니 날 알아보는 듯 내쪽으로 달려오더니 다리 위로 타고 올라오려는 듯 점프를 했다. 나를 쳐다보는 눈과 입이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이 맛에 개를 키우는구나 싶었다.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꼬리를 흔들고 나에게 엉겨 붙는 강아지. 그 순간 투로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부드러운 털과 나를 향한 관심에 나도 투로에게 마음을 주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산책을 나섰던 어느 날. 혹시 투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걷고 있었다. 멀리 투로가 보였다. 헬퍼가 나를 알아보고 투로와 인사를 할 수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티카. 인도네시아에서 온 티카는 아들이 일본에 있다고 했다. 아들을 만나러 일본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남편이 반대를 해서 아직 가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타국에서 고된 입주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집에 돈을 보내주면서도 아들 한번 보러 가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다니. 산책을 하다 보면 헬퍼 서너 명이 모여서 함께 개를 산책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 가난한 나라의 딸들이라는 공통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헬퍼들. 개들과 산책하는 시간이 그녀들에게도 잠깐이나마 자유의 공기를 마시는 시간이 될까?


투로는 날 알아보자마자 꼬리를 흔들고 펄쩍펄쩍 점프를 했다. 이리저리 만져주니 이번에는 바닥에 벌러덩 누워 배를 내어줬다. 개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애정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배를 보이며 눕는다고 한다. 투로는 나를 두 번 만나고 벌써 애정하고 신뢰하는 걸까?


싱가포르에 와서 날씨에 적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밖으로 나가는 날보다 나가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이삿짐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덥다는 핑계로 6개월을 그렇게 보내고 난 후 햇빛이 강렬하지 않은 아침 시간에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을 나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애써 찾는 날도 있었지만, 투로를 알게 된 후 산책이 점점 좋아지면서 일상이 되었다. 투로를 자주 만나다 보니 투로의 친구 강아지들도 알게 되었다. 개와 산책을 나온 헬퍼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동안 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털북숭이들을 원 없이 쓰다듬어줬다. 이렇게 가다가는 동네 강아지들을 다 알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모든 강아지에게 알은체하는 한국인 여자가 있다 ‘ 하고 헬퍼들 사이에 소문이 날 것도 같았다.


하루는 멀리에서 투로가 보여 기쁜 마음에 다가가는데 지나가는 다른 행인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더니 발라당 하고 배를 보여주며 눕는 게 아닌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었구나.'

투로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나라서,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혼자서 착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배신감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려는 찰나, 정신을 다잡었다. 배신감을 품는다는 것은 나에게 산책의 기쁨을 알게 해 준 투로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산책이 일상이 되어 시선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는데 그런 재미를 알게 해 준 투로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난 오늘도 역시 계속해도 후회 없을 행복한 착각을 하며 아침 산책을 나선다. 투로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어떤 것을 만날지 궁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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