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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Sep 28. 2022

얄팍한 거짓말을 하는 당신에게

'삐삐... 삐삐...' 깊이 없이 시끄럽기만 한 경적이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신경을 거스르는 이 소리는 뭔가 하고 생각하는 사이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1층으로 얼른 뛰어 내려갔다. 문을 열어보니 시끄러운 경적과 함께 트럭을 몰고 다니며 폐지를 모으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당시에 나는 싱가포르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매일매일 이삿짐 박스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정리가 다 된 빈 박스는 납작하게 펼쳐서 정원 옆 현관 입구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었다. 이사 당일에 다 풀지 못한 짐을 정리한 후 모아두면 이삿짐 센터에서 한 번에 무료로 수거해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남은 박스는 얼추 보아 60개 정도. 빈 박스가 하나씩 더 쌓일 때마다 임무 하나를 또 완수했다는 성취감과 함께 정원 뷰를 가리는 빈 박스도 어느새 내 키만큼 쌓여있었다. 


"Shall I take your boxes?"


폐지 수거 아저씨가 우리 집 현관에 쌓여있는 박스를 보고 물었다. 


"Is it free of charge?"


이삿짐 센터에서 무료로 수거를 해 가기로 했기 때문에 혹시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할까 싶어서 물었다. 아저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흔쾌하게 "Ok, Ok, for free!"라고 했다.


우리 집 앞 옆집에는 우리 가족의 동태를 매서운 눈초리로 조용히 지켜보는 Tan 아저씨가 산다. 언제나 늘어진 흰 티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중국계 Tan 아저씨는 새로 이사 온 이웃이 잘못을 하는지 안 하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앞쪽 정원과 현관 쪽에서 뭔가를 하다가 싸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있어 돌아보면 Tan 아저씨가 짧은 목을 길게 빼고 우리 집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폐지 아저씨가 오기 하루 전 Tan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박스가 저렇게 쌓여있으면 지저분해서 모기가 많이 생긴다고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을 했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모기 박멸에 심혈을 기울인다. 불시에 관공서에서 나와 물이 고인 곳이 있는지, 정원 화분을 비롯해 칫솔을 담아둔 용기까지 검사를 한다고 한다. 모기들이 물에 알을 까기 때문이라고. Tan 아저씨의 한 마디가 신경이 쓰이던 참에 폐지 아저씨가 알아서 박스들을 가져가 준다니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Where are you from?" 

폐지 아저씨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 "Oh, Korea!" 하면서 굉장히 반가워했다. 그러더니 "Do you have korean beer? If you give me korean beer or Cola or water, then I am happy." 이런다.

폐지를 수거해가는 대신 음료를 달라는 얘기였다. 이런 더운 날씨에 수고를 하니 말을 안 했어도 당연히 드렸을 물이었다. 유리잔에 담은 시원한 물을 갖다 주며, 맥주와 콜라는 없으니 두유라도 괜찮으시면 나중에 가져가시라고 했다. 


두유에 반색을 하던 아저씨는 이삿짐센터를 불러 가져 가도록 시키면 내가 돈을 내야 할 거라고, 무료로 해 준다고 했어도 적어도 주유값은 내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해외이사 패키지 안에 박스 수거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폐지 아저씨와 굳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할 건 아니어서 그냥 알겠다고만 했다.


박스의 양이 너무 많아 한번에 모든 박스를 다 가져가는 건 무리였다. 아저씨는 그 주 금요일에 다시 와서 나머지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자기 전화번호를 주면서 혹시 박스가 모이면 다음에라도 편하게 연락하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아저씨의 행동이 신기하면서도 감사하여 일하면서 드시라고 두유팩 하나를 더 갖다 드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저씨가 돌아가고 깨끗한 현관을 보니 마음마저 상쾌했다. 짐 정리를 열심히 하고는 있었지만 하루에 풀 수 있는 박스도 한정적이었고, 2주 정도 지나니 이삿짐 정리하는 것도 슬슬 귀찮아져서 정리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높이 쌓인 박스는 시야를 가려 답답해 보였고, 지저분해 보였다. 모든 짐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뜻밖에 쌓아 놓은 박스가 한 번에 처리되니 나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외출을 하면서 옆집 로렌스 아저씨와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에게 폐지 수거 아저씨가 박스를 다 수거해 갔다고 얘기를 해주며하 비용을 안 내는 게 정말 맞는지를 물었다. 추후에 비용이 청구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물으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보통은 폐지 수거하는 사람이 폐지의 무게를 달아 폐지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는 거라고. 

헉, 완전히 속았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지?' 

나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가져간 것보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내 덕에 이익을 취하면서 마치 자신이 나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행동한 그 태도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수거를 부탁했어도 돈은 못 받을 일이었다. 박스를 없애면서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폐지를 수거하는 사람의 주머니 사정이 우리보다 더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안 받아도 상관없었다. 당당하게 한국 맥주를 요구하고, '그 정도면 내가 이 일을 해줄게'라는 식의 태도,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가올 금요일과 그 이후에도 계속 같은 행동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속아서 고마워하는 나를 보고 재미있었을까?


누군가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다. 그렇다고 계속 기분 나빠한다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결과만 생각하기로 했다. 키만큼 쌓인 박스더미를 없앴고, 이웃 Tan 아저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며, 거실에서 바라보는 현관 뷰가 훨씬 좋아졌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금요일 오전, 더욱더 신경이 거슬리는 삐삐... 경적 소리와 함께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저씨. 결과만 봐서는 나에게 별로 나쁜 거래는 아니었지만 웃음으로 맞이할 수 없었다. 인사성 바른 내가 차마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뚱하니 서 있으니 "이 박스 가져갈게" 하면서 잽싸게 남은 박스들을 트럭으로 옮겼다. 왜 거짓말했냐고 따질까 하는 찰나의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내가 이 아저씨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아무말 없이 남은 박스를 한 번 더 수거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뿐이었다. 시원한 물이며 두유며 챙겨주던 내가 경직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아저씨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박스들을 챙겨 사라졌다. 


소소한 이익이 중요한 당신, 기꺼이 대가를 받지 않고 줄 수 있는 박스들이었습니다.

세상에 비밀이란 것은 없지요. 한번 오고 말 동네가 아니면 신뢰를 쌓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모르시나 봅니다. 박스 값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을 텐데요. 

당신의 얄팍한 거짓말이 당신이라는 사람의 깊이를 알려줬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친절을 베풀 수 없습니다. 당신을 꼭 닮은 경적소리를 다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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