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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Nov 14. 2023

보드카 도둑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심장 박동이 머리까지 전해져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고 졸리기까지 해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즐겁게 놀 수가 없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게 유전이 되었는지 나는 술에 약하다. 술에 약한 정도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게임을 하다 벌칙으로 레몬소주 반 잔을 마신 적이 있는데, 얼굴이 순식간에 너무 빨개지는 바람에 얼굴을 식히려고 화장실에 갔었다. 나는 분명히 똑바로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화장실 문이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경험을 했다. 내 몸이 휘청거린 모양이었다. 레몬소주 반 잔 때문에 내가 몸을 내 의지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놀라웠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는 게 조심스러웠다. 


자꾸 마시다 보면 괜찮을 거라고, 자꾸 주량을 늘려야 한다고 먹이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술이 맛이 없었고, 술을 마시면 나타나는 불편한 반응 때문에 굳이 왜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회식에서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한 모금만 마셔도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모두들 내가 술을 많이 마신 줄 알고 많이 권하지도 않았고, 집요하게 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최대한 피해 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부정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술은 더더욱 내가 탐구하는 영역에서 벗어났다. 세상에는 술 말고도 맛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게다가 잘 마시기까지 한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잘 취하지도 않는다. 식사를 하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아페리티프부터 시작해서 생선에는 화이트 와인을, 육고기에는 레드 와인을 곁들여 마시고, 식사를 다 마치고 소화를 도와야 한다며 독일 슈납스(Schnapps)를 마시기도 한다. 여름날 맥주는 여느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물처럼 마시는데 우리는 현재 사계절이 여름인 싱가포르에 살고 있으니 우리 집 맥주 소비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맛있는 술을 부부가 함께 즐기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더니 언제인가부터는 모임 후에 운전할 사람이 상시 대기하고 있어 오히려 반기는 눈치다. 다른 커플들이 모임에서 집에 돌아갈 때 누가 운전할 것인지 실랑이를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자기는 공짜 대리 운전자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며 의기양양해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 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술을 사는 것은 대부분 남편 담당이다. 남편은 장 보는 것을 절대적으로 싫어하지만 와인이나 위스키는 기꺼이 사러 간다. 한남동에 살 당시 제주식당 바로 옆에 있던 '한남리커스토어'는 남편이 주류 쇼핑을 즐겨하던 곳이다. 맘 좋은 사장님은 단골고객인 우리에게 가격을 깎아 주시기도 했는데 그 친절에 보답하듯 남편은 더욱 열정적으로 주류를 사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도 Wine Culture라는 와인샵에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포착했다. 내가 술을 사는 경우는 요리용으로 술을 살 때가 유일하다. 티라미수를 만들기 위해 아마레또를 사거나 파스타용 소스를 만들기 위해 보드카를 사는 정도이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은 언제나 집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사러 나갈 필요도 없다.  


얼마 전 나는 Penne alla Vodka라는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보드카 한 병을 샀다. 슈퍼마켓에는 다양한 보드카가 있었는데 많이 본 보드카 중에 할인 행사를 하고 있던 Absolut Vodka를 샀다. 4인 기준으로 토마토소스를 만들 때 보드카 50ml가 필요했다. 700ml짜리 보드카를 샀으니 요리를 하고도 분명 많은 양이 남아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보드카 병을 보니 반이나 비어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딱 하나, 남편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여 보드카를 산 당일에 남편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었다. 


"이 보드카는 요리용이니까 절대 탐내지 마."  


남편은 냉장고에서 뭘 찾아오라고 하면 눈앞에 있는 것도 못 찾는 사람인데, 요리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엌에는 자기가 먹을 시원한 음료를 꺼내기 위해서만 들어가는 사람인데, 소금, 후추와 어지럽게 섞여 있던 보드카는 어떻게 잘 찾아냈을까? 그에게는 금속 탐지기 같은 알코올 탐지기가 있는 것일까? 한 번이라도 더 Penne alla Vodka를 만들고 싶다면 보드카 병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곳으로 숨겨놔야겠다. 치사하고 싶지 않지만 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내 식재료는 내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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