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원의 우정
10 years. What a ride.
Happy anniversaire to us!
독일 지인의 소셜 미디어에서 결혼 10주년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사진을 보았다. 남자 동성 커플이다. 그중 한 명을 그가 한국에서 일했던 2005년쯤 여럿이 함께 모이는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는 소셜 미디어에 서로 친구로 연결되어 있어 가끔 소식을 듣는 정도의 사이였고,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도 한참 후에 결혼식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몇 년 안에 이혼하는 부부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 시대에 행복하게 지내는 그의 커플 사진을 접할 때마다 그저 조용히 응원을 했다.
대학 때 알고 지내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와 나는 가끔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편안한 친구 사이였다. 한쪽이든 양쪽이든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 때문에 우정으로 남기 어려운 게 이성 간의 우정인데, 그 친구와는 나는 별문제 없이 몇 년 간 친구 관계를 유지했었다. 고맙게도 서로가 딱 친구로서만 좋아하는 마음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만나자고 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서로의 집의 중간 지점인 강남역에서 만났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이야? 너답지 않게 왜 그렇게 심각해? 편하게 얘기해 봐."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꽤나 긴장된 친구의 모습에 나마저 긴장이 되었다.
"나 사실... 게이야."
"뭐라고?"
"나 게이라고. 남자 좋아한다고."
그는 186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키는 상당히 컸지만 누군가를 보호해 줄 것 같은 든든함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굉장히 수다스럽고 상당히 투덜거리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스타일이었다. 팔다리가 무척 길어 긴 팔을 휘저으며 말할 때는 주유소 앞에 서 있는 홍보용 풍선인형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한국 연예인 중에 최초로 커밍아웃을 한 홍석천 씨가 발표를 하기 이전이어서 성소수자 테마가 대화 주제로 올라오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 번도 친구가 동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의 고백에 이상하게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아, 그래?"
"너 왜 놀라지 않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는 일인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너랑 너무 잘 어울리네."
나는 싱긋 웃었다.
1998년에 HBO에서 방영한 미국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 캐리 브래드 쇼에게는 게이 남자친구 스탠포드 블랫치가 있었다. 그는 캐리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패션에 대한 조언도 해주며, 캐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는 절친이었다. 친구의 커밍아웃에 난 나에게도 스탠포드가 생긴냥 기뻤고, 내 삶이 갑자기 흥미로워지는 느낌이었다. 내 반응에 안도하던 친구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그가 발을 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느 대학에서 모임을 가졌는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라서 자기도 놀랐다는 얘기와, 외모만 보고 이성애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동성애자라며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이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 '그간 누구한테 털어놓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짠한 마음도 들었다.
하루는 그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친구들끼리 싸움이 붙었고, 누군가가 다쳐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친구의 부모님께 알리라고 했더니, 그럴 수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꼭 갚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어학연수를 가고 싶어 돈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고, 사회 분위기는 IMF 외환위기 이후라 환율도 높고 물가도 비싸던 시절이었다.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상당히 큰돈이었지만 친구를 믿고 20만 원을 빌려줬다. 돈을 빌려간 친구는 그 이후로도 가끔 연락을 하긴 했지만 돈을 갚겠다는 말은 없었고, 나 역시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 돈에 대한 얘기는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시간이 꽤 흘렀고, 먼저 연락을 하기가 어색할 정도로 자주 안 보던 시기에 약속이 있어 강남역에 나간 적이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친구는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알은체만 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때 알았다. 그 친구는 갚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미안한 마음도 불편한 기색도 전혀 없었다. 강남역에 놀러 나올 돈은 있지만 친구에게 갚을 돈은 없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얼마간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면 내가 모르는 어려운 상황이 있겠거니 하고 이해를 했겠지만, 마치 맡겨 놓은 돈을 가져가는 사람처럼 남의 돈을 쉽게 가져다 쓰고 놀러 다니는 모습을 보니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주 투덜거리거나 삐지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친구가 여자친구처럼 편했던 이성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꽤나 오래 친구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이성으로서 전혀 관심이 없는 편안한 이성 친구가 드디어 생겼으니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었던 마음에 친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프레임 안에 끼워 넣어 미화해서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언제나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믿었던 친구에 대한 실망감은 꽤 컸었다. '비밀스러운 고백을 듣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줬던 친구의 가치가 고작 그 정도였을까'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더 빌려줄 수 도 있었는데 20만 원을 빌려준 것은 나 역시 마음 한편에 그 친구가 갚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대학생으로서 큰돈이었지만 만약 갚지 않아도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한 금액이 20만 원이 아니었을까?
S야. 잘 지내니? 장남이라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알리기가 너무 어렵다는 고민을 털어놓았었지. 한국에서 인정받기 어려우니까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싶다고도 했었고. 내가 아는 동성 커플은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더라. 너와 나는 서로에게 딱 20만 원의 가치였나 봐. 어렸을 때는 크게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별거 아닌. 돈으로 살 수 없는, 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인연이 세상에 참 많은데, 너는 그 사이 그런 인연을 좀 만났을까? 너는 지금쯤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