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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May 28. 2024

달이든 손가락이든


 최근엔 세차를 열심히 했다. 그동안은 대부분 자동세차를 이용했는데, 차 내부가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는 아내의 말에 주변의 셀프 세차장을 검색해서 카드를 충전했다. 그곳에 있는 기본적인 방법으로는 좀처럼 오염이 지워지지 않길래 어쩌다 이런저런 수건이라던가 스펀지, 바구니 같은 것들까지 사게 되었다. 오래 탄 자동차지만, 이래저래 닦다 보니 광이 나고, 기분이 덩달아 말끔해졌다. 세차를 한 뒤 일 주가 지났다. 차가 충분히 깨끗한데도 괜히 더 더러워진 곳은 없는지. 이번 주는 세차를 하지 않아도 될지 자꾸만 살펴보게 된다. 이태리 타월로 때를 밀듯 죄를 깨끗하게 벗겨내고 싶다는 친절한 금자씨의 대사가 괜히 생각났다. 

 대구의 김형은 한참 전에 본인의 개원 이야기를 내게 해주면서, 식물을 가꾸듯 병원을 운영하라고 했다. 말의 뜻은, 식물이 가만히 정지한 듯 보여도 이런저런 부분들을 신경 써줘야 식물이 잘 자랄 수 있고, 병원도 각 요소들을 신경을 써야 잘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비유가 모호한 탓인지. 병원을 어떻게 식물처럼 잘 가꾸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대신 달이든 손가락이든, 병원의 식물을 잘 가꾸고 있다. 개원하며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개원 축하 화분들을 보내주셨고, 공들여서 관리한다. 최근은 봄이라서 성장세가 어마어마하다. 연웅이에게 받은 흰 호접란은 보통 1-3개월 핀다던데, 이제 개원한지 6개월이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꽃이 피어있다. 3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왜 대체 시들지 않을까 하고, 직원 선생님들과 함께 고민을 했다. 조화일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생화였다.  

  아무래도 새로 개원한 병원이고 다들 정신과 개원에 관심들이 많으시니 오셔서 병원을 둘러보고 가시는 경우들이 많다. 얼마 전엔 정신과 개원 준비 모임을 함께 한 선생님께서 병원을 둘러보고 가셨다. 병원이 예쁘다고, 이런 근사한 병원으로 출근하면 기분이 좋으시겠네요라고 칭찬하셨다. 분명히 개원을 준비하면서 어떤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으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어떤 다른 부분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선생님의 칭찬이, 자기만족과 관련된 부분이 강조된 병원이네요 하고 들렸다. 좋아하는 액자를 진료실과 검사실에 두고, 적당한 음악을 대기실에 틀어두고, 진료도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방법대로 하는 일. 마음에 드는 적당한 앨범을 발견하면 이걸 대기실에 틀어도 괜찮을까 하고 몇 바퀴 돌려보곤 크게 모나지 않는 음악이다 싶으면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둔다. 아무래도 봉직의 시절과 비교했을 때, 봉직의 시절에도 좋은 병원에서 덕분에 잘 근무했지만, 지금의 진료 시스템이 지금의 내게는 좀 더 잘 맞는 옷처럼 생각된다. 

 직장을 옮기면서 주변에 마땅한 테니스 레슨장이 보이질 않아서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레이너 선생님은 본인의 일을 스스로 굉장히 즐기고 있단 생각이 든다. 자세를 봐줄 때, 본인이 공부하는 책의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시는데 그 순간 눈이 반짝, 아 이 사람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다. 나는 사실 운동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은 운동이던, 수업이던, 즐겁다. 그런 반짝거림이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이다. 

 최근에 본 삼체에서 제일 마음에 남는 것은 1화 맨 앞의 문화 대혁명 장면이었다. 등선생님과 우리 같은 회색분자들은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의료 대란의 국면에, 모든 기사에 상처받지 않아야겠지만, 전공의 지원율이 높고, 많은 개원이 강남에 몰려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해 좋지 않게 쓴 기사를 읽었다. 나는 꼭 암이나 외상, 뇌출혈, 심근경색 같은 중증 질환만이 필수의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은 10세부터 59세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사망원인의 1-2위를 차지한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그래서 평가하기 쉽지 않다. 다른 과처럼 환자 수나, 검사 점수나, 아니면 다른 지표로 정신건강의학과의 일을 평가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치료가 오래 걸리고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모두가 쉬쉬하고 양지에 드러나있지 않다. 제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혹은, 저희 환자분들과 관계가 어떻게 좋아지고 있는데요 하는 말은 기사의 수치 앞에 무력하게 느껴진다. 내가 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매일 어떤 오해에 대해 다퉈야 한다는 것은 조금 지치기도 한다.  

 최근에 진료를 위해 어떤 병원을 방문했다. 개원한지 10년 이상이 된 듯한 느낌이었는데 선생님이 참 피곤해 보이셨다. 친절하게 해주시려고 노력은 하시는데  너무 기운 없어 보이셨달까. 내가 뭔가 선생님의 시간을 방해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면서 어서 진료를 위한 이야기만 빠르게 하고 병원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의사의 우울이 진료 중에 이렇게 전달되는구나 싶었다. 하루 종일 진료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의사는 어떻게 자신의 우울을 관리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 고립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우울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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