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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강 Nov 13. 2020

서문

일상을 기록한다는 것에 관하여

평범한 일상을 멋지게 글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그저 평범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글을 쓰는 작업 자체가 고되고 번거롭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 스스로도 일기 쓰기를 그만 둔지가 꽤나 오래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새삼스럽게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께 매일 검사를 받던 초등학교 때 일기를 가장 규칙적으로 썼던 것 같습니다. 고사리손으로 삐뚤삐뚤한 글씨로 매일의 일상을 반강제적으로 적어왔던 게 이제 와서는 유년기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때의 일기장을 보면, 지금 봐도 어린이의 관점에서 참신하게 잘 썼다고 생각되는 문장도 있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몇 시까지 뭘 하면서 놀았고, 저녁식사로는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시시콜콜하게 적어놓은 90년대 초등학생의 흔한 일상이 있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풍경, 옛 친구들, 그리고 추억이 되어 버린 다른 소중한 것들을 환기시켜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왜 지금까지 초등학교에 다닐 때처럼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았는지 후회를 하곤 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결국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렇기에 가끔은 일기장을 매일 검사하면서 따뜻한 글로 감상평을 달아주기도 하던 선생님의 존재까지도 그리워지곤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가 재미있다고 칭찬해주면서 나중에는 소설가 같이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직업을 찾으면 좋을 것 같다고 자주 감상평을 달아주셨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 선생님의 칭찬 덕분에 한동안은 멋진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은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딱딱하고 날이 서있는 법률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선생님의 예언이 다른 의미로 성취가 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나마 20대 초반 시절에 한 두 줄짜리 일지를 통해 매일의 일상을 그나마 활발하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시절 저의 일기장은 검정색 표지의 연습장이었는데, 흰 백지에 날짜를 기재한 후 볼펜으로 그날 있었던 이벤트, 짤막한 감상을 휘갈겨 적은 것이 일기의 형태였습니다. 저는 주변에서도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악필인데, 덕분에 일부 문장은 독해하는 데에 시간이 제법 소요되기도 합니다.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만 같은 글씨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글자의 자음과 모음의 형태학적 구성을 유심히 살펴야하고, 그래도 독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 전후문맥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독해가 안 되는 경우에는 해당 날짜의 일지에 대하여 ‘암호 해독불능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일기장에 기재되어 있는 글들 중 몇몇 문장은 현재까지도 해독불능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0대 초반 시절의 일기장은 초등학교 때의 일기장과는 다른 의미로 재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늦게 찾아온 사춘기에 방황하던 시기 특유의 오그라드는 감성과 허세를 혼자 즐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도 일기장에 기재한 문구를 버젓하게 게시해 놓은 적도 있기 때문에 오그라드는 감성을 혼자 즐길 수 있다는 말도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일례로 본인 미니홈피에 맥주를 마시고는 취해서 외로운 06학번 새내기 생활과 생각보다 빡센 법학전공에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건 하이네켄 맥주 밖에 없다고 하면서 수입맥주를 찬양하고 광고하는 내용의 다이어리를 게시한 게 기억이 나는데, 당시에 싸이월드 일촌들이 글을 읽으면서 피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것도 나름 흑역사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20대 초반 시절의 일기장을 보면, 당시의 저는 일주일에 최소 3번 이상은 음주를 했고, 법학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고민이 많은 동시에 감수성이 매우 여린 대학생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일기장에 기재된 내용은 주로 그날 어떤 과목을 들었고 어떤 과제가 나왔는지, 학교수업을 듣는 것에 대한 귀찮음, 당일 식사메뉴와 다녀간 술집, 그 시절 누구나 하는 연애고민이 대부분인데,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젊은 대학생 시절의 일상을 읽게 되면 그 당시의 풋풋함과 애틋함, 지나간 것들에 대한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후회라는 감정으로 인해 한동안 감상에 빠지곤 합니다.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무척이나 동경했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해가고 또 빛을 바래가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 그 고유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무한한 동경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의 내가 하루의 일상을 기록한다면 어떤 내용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초등학교, 그리고 20대 초반 시절보다 더 루틴하고 재미가 없는 내용으로 일기장이 가득차지 않을까라는 자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한 후, 사무실에서 서면을 쓰고, 또 재판을 다녀오고, 일이 많으면 야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찍 퇴근을 하거나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언젠가 시간이 더 지난 이후에는 다소 무미건조하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지금 이 순간, 이 평범한 순간을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있어서는 이 글을 쓰는 작업이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날짜가 명확히 기입된 상태에서 당일 있었던 이벤트와 감상을 그대로 기록하는 통상적인 일기는 아니지만, 그 동안 무심하게 지나온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감상을 자유롭게 써가면서 저는 지금 이 순간 본인만의 방식으로 추억을 남기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마치 젊은 시절 싸이월드에 남겼던 다이어리처럼, 제 글이 누군가에게는 공감, 즐거움, 그리고 추억의 소재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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