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질 무렵

시인이 쓰는 에세이

by 유명종

죽어서 더 아름다운 꽃이 있다.

남쪽에서 봄바람이 불어오면 강진 백련사로 가자. 절 이름이 백련사지만 그곳에 ‘흰 연꽃’은 없다. 하지만 백련보다 더 매혹적인 동백이 당신을 기다린다. 제주도부터 충남 서천의 마량리까지 동백나무 숲이 빼어난 곳이 여럿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백련사만큼 극적인 곳을 보지 못했다. 그곳엔 푸른 가지 위의 화려함과 땅바닥의 쓸쓸한 낙화가 공존한다. 아주 각별한 숲이다.


동백숲은 주차장부터 사찰까지 길게 이어진다. 특히 부도(浮屠) 몇 기가 띄엄띄엄 자리 잡은 동백나무 숲이 압도적이다. 사적비 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몸통이 기둥처럼 굵은 동백나무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다. 유배객 정약용에게 시를 짓게 한 그 동백나무 숲이다. 다산은 동백을 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푸른 가지에 핀 붉은 꽃을 보고 화려했던 ‘왕의 남자’ 시절을 떠올리고, 꽃송이째 떨어진 낙화에서 남도 끝 벽지로 귀양 온 쓸쓸한 한 사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제주동백수목원2507.jpg 사진-문신기


낙화는 이른 봄에 시작된다. 3월 말이면 동백꽃이 붉은 심장처럼 툭 떨어진다. 가장 붉은 생의 정점에서 송이째 투신한다. 땅바닥은 붉은 주단을 깐 듯 온통 핏빛이다. 바닥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 이름 모를 스님의 부도 위에도 헌화하듯 동백꽃 몇 송이 내려앉았다. 선홍빛으로 물든 동백숲 풍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그것은 부도와 낙화, 두 죽음의 서정이 파문을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처연한 미학이다. 여기에 유배객 다산의 쓸쓸함까지 떠올리면 서정이 더 깊어진다. 그곳은 마치 동백숲이 아니라 차라리 붉은 시편 같다.


동백꽃에서 슬픔을 읽은 건 그때부터였다. 붉은 동백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감정의 밀도가 높아진다. 뼈마디가 아프도록 온몸을 바쳐 붉은 봉오리를 터뜨리는 동백을 보고 있으면 숭고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빠져든다. 그러나 봄날의 환희도 잠시, 절정의 순간에 꽃송이째 몸을 던져 가장 고결한 방식으로 작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붉은 꽃의 행렬을 보고 있으면, 비극 한 편을 본 거 같은 숭고한 비애를 경험한다.

아, 붉은 시의 숲, 죽음의 붉은 연대여.

카멜리아힐2503.jpg 사진_문신기






*비하인드 스토리 behind story

백련사 동백꽃은 꽃은 겨울부터 피기 시작하여 3월 말경에 만개한다. 이때부터 낙화가 시작되어 4월 초에는 가지에서보다 몇 배는 더 장엄하게 땅에서 다시 피어난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