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용담 숙소에서 일어났다. 올레길 19코스를 시작하려면 조천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버스정류장에 7시에 도착했지만 4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여기가 서울이 아니란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나 보다. 버스 배차간격이 아주 제주스러웠는데 40분이나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니 조천에 도착했고 올레길 19코스 입구에 위치한 공식안내소로 갔다. 여기선 올레길 패스포트를 살 수 있다. 1~21코스 스팟을 지날 때마다 도장을 찍어 여권을 완성하면 된다. 여권가격은 무려 2만 원. 거금을 들여 꼭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번 여정은 워낙 신체적으로 고될 텐데 돈에게까지 구애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완벽한 여정을 만들 수 있다면 2만 원쯤이야...
무려 2만원에 달하는 올레길 여권. 여권에 도장을 꽉 채워 넣겠다는 욕심이 여정을 망치지 않도록 주의할 것!
19코스 출발점(안내소)에서 도장을 쾅 찍고 동쪽 해안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함덕해수욕장이 나왔다. 함덕해수욕장은 내겐 아련한 바다이다. 함덕해수욕장은 우리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20분, 버스를 타고 다시 40분 정도를 가야 했는데, 어린 나에겐 너무 먼 거리였다. 일분이라도 빨리 바다에서 놀고 싶던 나는 먼 함덕까지 가는 길을 참지 못하고 결국 20분 거리에 있는 삼양해수욕장에 내렸다. 부모님도 내가 바다를 가자고 보채면 함덕이 아닌 삼양해수욕장을 데려가셨는데, 그건 아마 황금 같은 휴일에 일분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삼양해수욕장은 검정 모래 바다여서 물빛이 까맣다. 검정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다지만, 어린 나는 검정 모래의 비주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늘빛 바다와 백사장이 있는 함덕해수욕장에 가야지 매년 다짐했지만, 어느덧 20세가 되어 서울로 가게 됐고 해수욕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놀이가 되었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서우봉에 올라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보면 경치가 정말 끝내준다. 서우봉 올라가는 것은 조~금 힘들 수 있다.
함덕해수욕장을 뚜벅뚜벅 걸어서 지나가다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때는 버스를 타고도 가기 힘들 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곳을 걸어서 지나고 있다니.
함덕해수욕장 옆에는 바다를 향해 볼록 튀어나온 동산이 있다. 서우봉이라고 부르는데 한 번도 올라본 적은 없다. 혹은 올라봤어도 너무 어렸을 때라 남아있는 기억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서우봉에 십분쯤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색 물결이 반짝거리고, 그 앞 초원에 작은 말이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아하니 가슴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아, 이런 바다여서 그렇게 가고 싶어 했었지. 사진을 찍기 위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다가 눈에 먼저 담아야지 싶어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30초쯤 지나니 손이 근질근질해져서 휴대폰을 꺼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렸다.
이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자 무려 5명의 친구로부터 DM을 받았다. 해안가의 말이라.
서우봉에서 동쪽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니 풍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풍차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바로 눈앞이다. 원하면 만질 수도 있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번지점프했을 당시의 40m 번지타워와 지금의 풍차를 비교해 보니 풍차는 거뜬히 70m쯤 될 듯했다. 이런 풍차들이 제주 동쪽 해안가에 빼곡히 자리 잡아 윙윙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큰 것들을 제주도에 가져왔지? 기둥을 육지에서 만들어서 배에 실어서 하역해서 트럭에 실어서 땅에 심고, 그다음엔 또다시 이만큼 큰 프로펠러를 만들고 실어서... 상상으로도 엄두가 안 난다. 풍차관련주 씨에스윈드가 2020년에 폭등했던 이유가 다 있었군 싶었다. 지금이라도 사볼까? 아냐 이번 여행에 이런 잡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지금 내 눈앞 소중한 순간들에 집중하고 만끽하자.
아무리 돈키호테여도 이 풍차를 봤다면 싸울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사실 지난 1~2년 간 내 머릿속은 주식이 60%는 차지했다. 엄밀히 말하면 어떻게 먹고살고, 어떻게 부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방법이 주식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방법이 부자가 되는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되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파란색 화살표가 현실이었다. 한계를 느낄 때마다 공부에 공부를 또 반복했지만 내 맘대로 되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는 돈, 주식, 부동산 같은 고민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소중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할 때조차 그러지 못했다. 올레길을 걸으며 습관적으로 카카오톡 주식 단톡방에 올라온 뉴스링크를 클릭했다가 '어휴, 왜 그러냐? 폰 들여놔' 스스로를 따끔하게 혼내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지금 내 눈앞 소중한 순간들에 집중하고 만끽하자.
풍차 아래를 지나다 보면 회사 빌딩보다 높고 기다란 프로펠러가 윙윙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돌고 있다. 그 바로 밑을 지나면서 저게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회전을 하고 있으니 떨어지더라도 바퀴처럼 몇 번 더 콩 콩, 땅 위를 구를 것이다. 두 바퀴만 구르면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는 그 틈새를 피해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더니 오싹하면서도 스릴 있었다. 이렇게 큰 풍차가 수십 개 있어도 사실 그 발전량은 화력발전소 하나에 비할게 못 된다. 제주도 땅을 모조리 뒤덮듯 해야 화석연료를 실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면 확실히 친환경적이고 경관은 웅장하겠지만, 그곳 주민들은 프로펠러가 콩 콩 굴러다닐 상상에 오싹할 것 같았다.
제주도 동해안은 수십 개의 풍차가 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데 가까이서 보면 조금 무섭기도 하다.
19km에 달하는 19코스(제일 첫 코스)는 8시 반부터 시작해 1시쯤에야 끝이 났다. 오늘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곤 아메리카노 한 잔뿐이라서 배가 고픈 것을 뛰어넘어 체력이 방전되는 게 느껴졌다. 김녕해수욕장을 지나다 보니 식당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지도를 켜서 맘에 드는 메뉴가 있나 살펴보니 보말 칼국수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까지 와서 웬 칼국수냐 싶겠지만, 추운 날씨 19km 걸어봐라. 뜨끈한 국물이 있다면 멸치국수라도 먹고 싶어진다. 식당에 들어가 보말 칼국수와 보말 파전을 시키며 배 터지게 먹으리라 다짐했다. 오늘은 에너지소모가 클 테니 마음껏 먹어도 무죄이기 때문이다. 보말칼국수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니 겨울바다 바람에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이어서 파전을 먹으니 혀에 기름이 반지르르 돌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행복이 오래가진 않았다. 둘 다 보말메뉴를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굉장히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보말의 바다냄새가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절반쯤 먹었을 때는 음식에서 짠 바다 맛만 느껴졌다. 옆 테이블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는데 한 접시 나눠먹고 싶었다. 천성이 음식을 못 남기는 터라 기어코 다 먹어치우긴 했으나 다시 길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다지 경쾌하진 못했다. 만약 김치찌개와 보말파전을 먹었으면 육지와 바다가 어우러진 그 맵짠의 경지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뭐 어쩌겠나, 다음 식당은 꼭 성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