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코스(두 번째 코스)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사진으로 그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20코스는 17km 정도를 가야 했는데 확실히 직전 19코스 때보다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발가락이 아팠고, 수술한 왼쪽 무릎이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을 잊게 만드는 진정한 고통이 찾아왔다. 20코스의 중간쯤 되는 월정리 해수욕장을 막 지났을 때였다. 아까 먹은 보말들이 배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보말들이 어제 서울에서 먹고 온 마라탕과 내 배에서 서로 밀어내며 자리싸움을 하는 듯했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말 신기하게도 그 많던 식당과 건물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와 돌과 풀 뿐이었다. 저 앞에 희미하게 건물이 하나 보이긴 했는데 보아하니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시설 같았다. 아 정말 어떡하라 윽! 고!! 네이버 지도를 켜서 공중화장실을 검색했다. 생생히 기억한다. 화장실까지 '1.8km' 남았다는 그 잔인한 숫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내 여정이 다리가 아파서, 무릎이 아파서, 비가 와서가 아니고 이것 때문에 끝난다 윽! 고? 왜 풀은 다 갈대인 거야? 조금만 넓은 풀이었다면 최후의 카드로 쓸 수도 있을 텐데.
이 검색기록에는 내 처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1km 정도를 지나니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너지 무슨 연구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의 화장실은 마음 놓고 써도 된다고 했다. 그래,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내는 주민세로 운영되는 곳이겠지? 그렇다면 내게 화장실을 내놓아라. 하... 건물의 문이 모두 잠겨있고 불도 꺼져있다. 문 잠겨 있다고 입구에 써 놨어야지. 괜히 동선만 낭비했다. 이제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어줍잖은 건물에 희망을 가지면 동선만 낭비한다. 이제 800m 남은 공중화장실만이 살 길이다 윽 엑. 벨트를 풀었다. 호흡을 끊어서 하기 시작했다. 흡합흡합. 어디선가 이렇게 호흡을 하면 몸에 긴장을 주어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들었다. 흡합흡합. 내 노력에 대장(大腸)이 감명받았는지 배 안에서 격정적인 무빙을 하지 않고 내게 기회를 주었다. 남은 거리를 네이버 지도로 새로고침을 하며 간다. 70m 60m 50 40... 10...m 보인다. 휴지가 있을까?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휴지가 있든 없든 네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다. 열려있어만 다오. 철컥 끼이이잉. 열렸다!
새로 태어난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올려다본 하늘은 아름답고, 노랬던 바다는 어느샌가 본연의 파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세상은 아름다웠고 내 마음은 천사를 영접한 듯 평온했다.
갑자기 파랗고 아름다워진 세상
20코스 끝자락에 위치한 숙소까지 약 8km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무릎이 아프고 발가락이 신발에 눌려 아프다 한들 그게 뭔 대수랴. 나는 생사를 오고 간 사람이다. 지나며 보이는 강아지들에게 인사하며 강아지에게 이름을 물었다. 어구구구 귀여워 네 이름은 뭐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숙소를 3km 정도 남겨두고 잘못 든 길에서 본 망아지
오후 5시 반. 나는 여전히 걷고 있었고 숙소가 코앞이었다. 이제 슬슬 저녁을 먹을 때가 됐다. 그러던 중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메뉴는 두반장가지덮밥이었는데 처음 먹어보는 메뉴였다. 가지란 자고로 튀기고 볶아야 제맛이거늘 이것은 가지를 살짝 익혀 만든 건강식이었다. 밥이 참 잘 지어졌다는 것은 느껴졌지만 못내 아쉬웠다. 뜨끈한 국물을 먹었어야 했나 보다. 괜히 올레길 느낌 내보겠다고 내 취향이 아닌 식사를 했다. 내일은 강렬하고 자극적인 식사를 해야지 다짐했다. 게스트하우스까지 남은 3km를 멈추지 않고 걸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찬 바람을 맞아서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메뉴판에 '채식'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유념해야 했다. 난 확실히 '육식'을 좋아한다.
올레길에는 이런 글귀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유독 이 글귀에 이끌려 앞에 멍하니 앉아 한참을 쉬었다. 직장 4년 차 사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