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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토 Feb 08. 2022

[올레길] #3. 여기 모인 네 남자

제주 올레길 위에서의 모든 생각 (1일차, 20코스 끝내고 숙소)

지난밤, 올레길 출발 전 머문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옆이었다. 저녁 9시쯤 모교를 거닐다 서점을 하나 발견했는데 갑자기 책 한 권 사고 싶어졌다. 서점에 들어가 어떤 책이 있나 둘러봤다. 책 제목은 '그냥 하지 마라'라는 송길영 작가의 책이었다. 유명 유튜브 채널 삼프로티비의 광고에 자주 나오는 분이었는데 뒤로 묶은 머리가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니어서 책 살 생각은 딱히 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점을 둘러보니 그 책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결국 그 책사게 되었다. 헤어스타일이 어땠든 간에 그 광고는 내게 매우 성공적인 마케팅이었다.


깨끗이 씻고 난 후 책을 좀 읽으며 여유로운 여행을 온 흉내라도 내야지 싶어서 게스트하우스 3층 라운지로 갔다. 설 명절이라고 다들 고향에 갔는지 사장님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 메모장에 여행일기를 쓰고 시간이 남으면 책을 좀 읽어보려 했다. 일기를 삼십분쯤 쓰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한 남자분이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왔다. "혹시 맥주 한잔하실래요?" 한국의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인데 원래 이런 건가 싶었다. 학생 시절 외국여행할 때 게스트하우스에 가면 키 큰 외국인이 말 걸어올까 두려워 침대에만 있었던지라 모르는 여행객이랑 게스트하우스에서 술 먹은 경험이 거의 없다. 한국의 게스트하우스도 외국 게스트하우스 못지않게 편하게 모여 술을 먹는 분위기인가 보다. "아 네! 갈게요!".


게스트하우스 3층 라운지. 편하게 누워 일기를 쓰는데 왼쪽 계단에서 형님이 맥주를 먹자고 권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레길을 걷고 있어요". "저는 오늘 버스 타고 온천여행을 다녀왔어요". 날 초대한 사람은 동안의 39살 형님이었다. 나는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갑자기 맥주 자리를 갖는 것은 평생 처음이라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갈지 몰라 형님의 여행 일정에 꼬리물기 질문을 하며 힘겹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래 계단에서 쿵쿵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가 꽤 컸는데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한 아저씨였다. 갑자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더니 우리랑 멀리 떨어져 앉길래 같이 옆에 앉으시라고 권해서 합석하게 됐다. 뭐 하는 형님이실까. 잠시 후 아래서 다시 한번 쿵쿵 누군가가 올라왔다. 동생 같은 외모의 눈이 똘망똘망 한 남자분이었고 이 분도 우리 대화에 참가했다. 갑자기 결성된 어색한 4인이 모여 어색한 건배를 했다.



(1) 39살 건설회사 형님

39살 형님은 건설회사를 다닌다. 요즘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는데 사고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지 말자는 회사의 분위기로 인해 건설회사들이 공사현장을 모두 일시 중단했고 얼떨결에 휴가를 쓸 수 있게 되어 제주도로 휴가를 왔다. 평소엔 혼자서 제주도 호텔을 잡아서 호캉스를 보내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 여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맥주가 한두 모금 들어가니 어느샌가 하고 싶은 말을 맘 편히 내뱉고 있었다. 형님이 나한테 30대가 된 충격 때문에 올레길을 걷는 거냐고 비웃었는데, 나는 이에 대해 내년에 40대 되시면 형님도 걷게 되실 거라고 맞받아쳤다. 형님은 대화 내내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비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법이다". "이렇게 공사가 중단돼서 공기를 못 맞추면 집 값이 오를 수 밖에 없다". "당장 집을 사라". 아멘.


(2) 금목걸이 금반지 선생님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하고 있는 덩치 큰 사람은 놀랍게도 나랑 30세 동갑이었다. 타지에서 제주도로 내려와 중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가 좀 크다길래, 내 모교인지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어떻게 알았냐며 눈이 동그래졌다. 이 선생님은 30세를 맞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도 할 겸 요 며칠 자전거를 빌렸고 오늘 우도를 한 바퀴 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체인이 끊어졌다고 한다. 자전거를 끌고 제주시로 나와 자전거를 수리하고 다시 달리는데 체인이 또 끊어지는 바람에 결국 5km 정도를 자전거를 끌고 숙소에 왔다고 한다. 식당에서 맛있는 걸 먹을 기운이 도저히 나질 않아 편의점에서 몇 개 골라 게스트하우스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라면 두 개, 주먹밥, 핫바가 간단한 식사인지는 모르겠다. 원래는 할리데이비슨 1600cc를 타고 달리는 게 취미인데 처음으로 자전거 투어를 하다 이 사달이 났다며 한탄했는데, 글썽이는 눈망울이 금목걸이랑 미스매치돼서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3) 박사동생

제일 마지막으로 참가한 손님은 부산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같이 학교에 다니는 여자친구의 고향이 제주도여서 여행도 할 겸 같이 내려왔지만 여자친구 집에 묵기는 눈치가 보여서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를 잡았다고 한다. 딸을 따라 제주도에 인사하러 온 딸의 남자친구를 게스트하우스에 재우는 아버님은 어떤 기분일까? 한참을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사동생은 내일 여자친구와 눈이 쌓인 한라산을 갈 계획인데 등산 복장을 잘 갖췄는지 아버님의 검사를 받으러 간다며 중간에 자리를 비웠다. 아니 오밤중에 복장검사도 할거면 차라리 그냥 집에서 좀 재워주시지 ㅋㅋㅋ.


(4) 나

마지막으로 내 소개 차례다. 나는 어저께 제주도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을 가는 길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오자마자 할머니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라고 하셨는데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올레길로 출발해야 하니 할머니 집이 아닌 부모님 집으로 가서 쉬고 명절날 할머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그럴 거면 제주도에 오지 마!"라고 하셨다. 사실 이런 갈등은 매번 명절마다 반복되는 래퍼토리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제주도에 도착한 날, 명절 당일, 돌아가는 날 모두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갈 것을 요구하셨는데 명절을 맞아 겨우 3~4일을 내려오는 우리로서는 할머니의 고봉밥을 두세 끼 먹으면 결국 제주도 맛집도 한 번 못 가보고 휴일이 끝나게 되므로 아버지와 트러블이 잦았다.


어제 나는 회사일을 마치고 저녁 6시 2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공항을 가던 와중 아버지의 그 전화를 받았고, 그럴 거면 제주도에 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 그럼 안 갈게요"라고 나도 모르게 되받아치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행기 표를 버릴 순 없었고 이륙 직전에 비행기 안에서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매주 할머니 집을 찾아뵀기 때문에 아들들의 고충을 당신도 충분히 이해하셔서 아들들 편을 드신다. 어머니는 9시에 식당들이 문을 닫기 전에 빨리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고기국수 집으로 데려가셨다. 고기국수를 먹은 후 어머니의 차를 몰아 게스트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가는 게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보셨지만 나는 6만원 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취소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사실 2만원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간단히 짐정리를 한 후 근처를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잘못 한 건가?', '아니 근데 육지사람들 다 하는 제주도 관광을 나도 좀 해보고 싶은데 왜 우리 의견을 존중하지 않으시지?', '어려서부터 일요일마다 할머니 집에 갔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다른 가족들은 명절에 해외여행도 간다는데 왜 우리는 벌초, 할머니집, 제사 뿐인거지'. 길을 걷던 중 눈앞에 서점이 들어와서 책 한 권 사 주머니에 넣었다. 더 걷다 그 동네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를 불렀고 같이 오랜만에 학교 근처를 산책하다 숙소로 돌아왔다. 찝찝해서 잠이 안 왔다. 내일 아침 6시 기상해서 첫 코스를 걸어야 하는데 잠이 안 와 침대에서 뒤척이다 한시가 다 돼서야 잠에 들었다.


올레길 출발 전 묵은 숙소 근처. 거닐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정리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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