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드라마. <괴물>, <마우스>
<괴물>(JTBC, 드라마, 2021.2.19.~4.10)
'괴물은 누구인가. 너인가. 나인가. 우리인가.'
만양에서 펼쳐지는 괴물 같은 두 남자의 심리 추적 스릴러
심나연(연출), 박우람, 김보름(프로듀서), 김수진(극본)
-출처 <다음>
<마우스>(tvN, 드라마, 2021.3.3.~5.19)
자타 공인 바른 청년이자 동네 순경인 정바름과 어린 시절 살인마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를 향해 달려온 무법 형사 고무치가 사이코패스 중 상위 1퍼센트로 불리는 가장 악랄한 프레데터와 대치 끝,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모습을 그려낸 본격 인간 헌터 추적극
최준배(연출), 최란(극본)
-출처 <다음>
* 시민의 비평상 수상 작품집(방송문화진흥회 엮음, 『엄마, 불완전한 세상도 참 따뜻한 거죠?』, 「괴물에게 서사를 만들어주는 일의 의미」, 2021, 한울엠플러스)에 실린 글을 수정하고 다듬은 글입니다.
수사물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드라마의 초점이 사건에서 인간성으로, 사건의 진실에서 인간의 진실로 옮겨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시그널>(2016)과 <비밀의 숲>(2017), <비밀의 숲 시즌2>(2020)는 주로 장기미제사건과 내부비밀을 추적했다. 그리고 올해 방영한 <마우스>와 <괴물>은 앞선 작품들이 삼은 소재를 토대 위에 주로 인간성을 추적했다. 그렇다면, 이 두 드라마는 인간의 정체를 발견하기 위해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고민했는가. 이 두 드라마는 ‘개인과 집단’ 및 ‘부모와 자식 ’이라는 두 관계의 양상에 주목하고, ‘고통과 구원’ 및 ‘범죄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우선, <마우스>와 <괴물>은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드라마에서 인간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마우스>에서 사이코패스처럼 집단에 위해가 있을 수 존재는 집단의 안전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며 집단의 안전한 존속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예방하기 위해 실험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정바름(이승기, 태아감별을 통해 사이코패스로 판정받은 인물)과 성요한(권화운, 태아감별로 사이코패스로 잘못 판정받은 인물)은 사회 안전을 위해 관찰 및 감시를 당하는 실험체가 되었던 것이다. <괴물>에서 만양사람들 또한 개인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만양사람으로서 행동하기도 하므로 개인으로서의 행동양식과 ‘만양 사람’으로서의 행동양식에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만양 사람으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의 부조화 속에 만양 사람으로서 받은 상처와 개인으로서 받은 상처가 복잡다단하게 똬리를 튼다. 만양 사람들은 외지인을 향해 즉시 단결하여 그를 대놓고 의심하고 경계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자기들끼리 은연히 의심하고 경계한다.
다음으로, <마우스>와 <괴물>은 부자 간 갈등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우스>의 정바름은 사이코패스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아버지가 저지른 살인행위는 물론이며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기억해내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괴물>의 한주원(여진구)은 아버지의 진급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는 어머니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는 일과 뺑소니 사건을 감추고 불의를 저지르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려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야 했으며, 이동식(신하균)은 자신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 불의한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아들 박제정(최대훈)을 보호하고 자신의 꿈도 성취하는 도해원(길해연)과는 달리 자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상처받아야 했다. 즉, 두 드라마는 한편으로는 아버지로 인한 죄책을 짊어지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죄책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되돌려주면서-정바름은 아버지를 죽이고, 한주원은 아버지를 체포하면서-자기를 실현하는 불쌍한 오이디푸스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우스>와 <괴물>은 영원할 것 같은 고통 속에 갇혀버린 불쌍한 오이디푸스들을 어떻게 해방하는가. <마우스>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괴물>은 죄를 구분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을 해방시킨다. 그런데 고통과 구원이라는 문제는 신을 요청하게 한다. 고통을 죄벌로서 이해한다면, 고통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연유하는 곳은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우스>와 <괴물>의 첫 회의 공간적 배경은 모두 성당이다.
우선, <마우스> 첫 회에서 어린 정바름은, “나 괴물로 태어났대요. 그날 난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괴물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신은 결코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살인마가 되었다.”라고 고백한다. 이후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정바름은, “괴물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잖아. 빌었잖아. 근데 넌 내 기도를 철저히 외면했어. 그러면서 니 따위가 무슨 신이야. 이제부터 내가 신이야. 니가 한 개소리를 믿고 따르는 인간들 내가 싹 다 심판할거야. 나는 프레데터다. 나는 프레데터였다.”라고, 신을 원망하고 증오한다.
그런데, 뇌수술을 통해 감정을 갖게 된 정바름은 살인을 저질렀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괴로워하며 악이 신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온 것임을 받아들인다. “하느님은 니 기도를 들어주셨어. 넌 더 이상 괴물이 아니야.”
<마우스>는 고무치(이희준) 형사의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끝이 난다.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괴물이 있었다. 신은 그 괴물에게 감정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처절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참회하며 죽어갔다. 신은 그에게 천벌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그를 구원한 것일까.”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마우스>는 고무치 형사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인간의 과학 너머에 신비로운 신의 은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우스>는 이렇게 정바름을 통해 고통과 구원의 신비를 다루면서 이에 대한 두 가지 규율 사이에서 고통 받는 인간을 다루는데, 그 인물이 바로 고무치 형사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 주변엔 늘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구약의 규율이 맴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우스>에서는 이 두 성경 구절이 자주 언급된다. 연쇄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고무치 형사와 연쇄 살인마 정바름은 구약의 응보의 원칙을 따르고, 고무치의 형이자 천주교 사제인 고무원과 고무치의 어머니는 신약의 사랑의 원칙을 따른다. 이 두 가지 규율이 고통 받는 인간을 더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고, 구하기도 한다. 인간을 고통에서 구하려면, 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규율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괴물>에 답이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올바르게 실현하려면 적어도 얽히고설킨 각자의 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며, 그런 후에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마우스>와 <괴물>은 이것이야말로 죄벌을 분명히 다룰 수 있도록 입법하고 판결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과제라는 점을 자주 암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괴물> 속 경찰과 만양 주민들은 우리나라 법을 원망하면서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서로를 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왜 한편으로는 법을 원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벌의 사슬에서 서로를 구하려고 할까. 죄벌에 구속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죄벌의 경계가 불분명하니 <괴물> 속 인물들은 서로 더 의심하고 가책한다. 어떤 사람은 가족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은 가족이 아닌 타인 때문에 합리적 의심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이를 의심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사로잡힌 죄악 때문에 세상을 향한 괴물 같은 시선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괴물 같은 시선은 끊임없이 합리적인 의심의 시선으로 외부를 보게 하고, 외부를 향해 분노하게 한다.
그런데 이 괴물 같은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자아는 내부를 향해서 가책이 똬리를 틀게 하여 자기를 파먹게 하기도 한다. 괴물 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내 인생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생도 아닌 길 위에 있게 되며 괴물도 아닌 인간도 아닌 어디쯤 있게 된다.
위와 같은 이야기야말로 <괴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죄벌과 용서를 다루며 신의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고통에서 인물을 구하려는 드라마는 낯익지만, 죄벌을 분명히 심판하기 위해 먼저 가책과 고통에서 인물을 구하려는 드라마는 아직 새롭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괴물>은 죄의 서사를 복잡하게 만들어 인물들을 가책의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가 끝에서 인물들 각자의 죄벌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들을 해방한다. 그리고 부모의 소망과 죄벌을 짊어지기 시작하기 전, 그리고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사건이 덮치기 전의 그들을 향했던 소망을, 이동식의 목소리로 다시 들려준다. “주원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똥 잘 싸고!”
그렇다면 의심하고 가책했던 그들의 삶은 허구이며 맹목이었고, 또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난 시간이었는가.
아니다. <괴물>은 그 허망하고 피폐한 시간에 희망을 걸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을 구한 것은, 다른 사람의 죄와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이 받는 벌과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보내야 했던 모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의 첫 회 첫 장면에서는 성가대가 성가를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성가의 가사는 이러한 연관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 불신이 만연해도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서 살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들 가는가.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가난과 주림에 떨면서 원망에 지친 자와 괴로워 우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히 사는가. 이 어둠에 싸인 세상을 천주여 비추소서.”
이 드라마는 이 성가로써 불의와 불신이 만연한 세상을 알리고, 선한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통해 한편으로는 세상에 덮친 불의와 불신에 빛을 비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한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위해 드라마는 드라마 속 인물들 중 누구도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고는, 그 인물들 몇몇이 자기가 연결한 사슬 부분이라도 풀어내려는 의지를 갖게 함으로써,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협력하게 함으로써, 불의와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거기에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두 드라마는 고통과 구원의 문제에 관해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고 다른 방식에 희망을 두는 한편 범죄자의 서사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로 향하게 한다. 이것이 이 두 드라마가 기도(企圖)한 바이다.
우선, <마우스>는 정바름의 생물학적 조건과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그의 살인을 방기하는 정치인들의 욕망이 살인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함으로써 범죄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준다. 또, 그가 뇌수술을 받은 이후 감정을 갖게 되면서 고통스럽게 가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괴물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소년이 스스로를 신을 능가한 프레데터라고 규정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삶의 끝엔 돌아온 탕자가 되어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범죄자의 서사를 들려준다.
다음으로, <괴물>은 강진묵(이규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드라마는 성가대가 “불의가 세상을 덮쳐도”라는 성가를 연습할 때 강진묵이 제대에 꾸밀 꽃을 배달하러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때 성전 속 한 자매가 강진묵을 무시하고 나무라며 이동식의 어머니에게 동식의 동생인 이유연의 서울대 합격을 치켜세우기만 한다. 이유연의 어머니는 강진묵을 무시하는 모습을 방관하고 성가대는 강진묵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강진묵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부모도 없이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형제·자매가 되기 위해, 그들로부터 친절을 간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을 더듬었고 어수룩하고 순진하게 행동했다.
결국, <마우스>와 <괴물>은 한기환이 한주원에게 하지 말라고 한 일, “범죄자에게 서사를 만들어 주는 일”을 했다.
<마우스>와 <괴물>의 원형이 있다면, 바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일 것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역시 <괴물>과 <마우스>처럼 살인을 저지른 괴물에게 서사를 만들어 주어 언제라도 괴물이 될 수 있는 선량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마우스>는 사이코패스이자 연쇄 살인마인 정바름에게, <괴물>은 강진묵의 살인과 이동식과 한주원의 불법 행위에 서사를 만들어주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진실을 생각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자신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자기의 이야기-서사를 들어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중략) 일말의 동정심을 허락해달라. 내가 한때 지녔던 미덕으로 이 한 가지만 요구하겠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중략) 내가 인간 세계를 영원히 떠나 무해한 삶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을 응징하고 당신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악마가 될 것인지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다.”(메리셸리 지음, 『프랑켄슈타인』,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12, 134~135쪽) 괴물의 이야기를 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그 괴물을 여전히 용서할 수 없지만, 결국 괴물의 소외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만든 괴물을 통해 자신의 폭력성과 광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 두 드라마 역시, 괴물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을 견지하며 살인자에 대한 적의가 생기기 전 판단을 중지하게 하고 그들의 서사를 들려준다.
<마우스>와 <괴물>은 살인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줌으로써 두 가지의 질문을 건넨다. 우선, 살인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줌으로써 살인자를 동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그들과 무관한가, 라는 질문을 건넨다. 그래서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을 나 자신의 생령(生靈)이었다”(위의 책, 99~100쪽), 라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또, 살인자에게 서사를 만들어줌으로써 괴물이란 결정된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각자는 인간성과 괴물성의 경계에서 어떤 속성을 더 많이 형성해 나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건넨다. <마우스>에서 사이코패스 유전자 태아 낙태 법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쇄 살인을 방관했던 최영신(정애리)에게 “당신도 나랑 똑같은 괴물이야.”라고 했던 정바름의 말과, <괴물>에서 한주원에게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이 되는 수밖에”라고 했던 이동식의 말을 통해, 각자는 괴물인지 괴물이 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두 드라마는 프랑켄슈타인의 고백처럼 우리의 생령(生靈)을 상상적으로 재현했다.
즉, 이 두 드라마는 ‘너는 마우스다.’, ‘너는 괴물이다.’라고 규정하기 전, 즉 마우스와 괴물을 타자화하기 전에 판단을 중지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겨냥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연민과 이해일 것이다. 누구든 선천적·물리적으로 흠결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누구든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삶에서 후천적·정신적으로 괴물로 형성되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기존 수사물들이 사건을 좇는 사람들의 서사를 들려줌으로써 범죄 피해자들의 소외에 관심갖게 했다면, 이 두 드라마는 기존 수사물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 나아가 범죄자의 서사를 들려줌으로써 선악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게 하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