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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May 04. 2022

교양. 인간성 성찰을 위한 장치,
더블 캐릭터

『프랑켄슈타인』,  <프로메테우스>,  『아이, 로봇』


커버 이미지 :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감독 크리스 콜럼버스, 2000)에서, 가사도우미 로봇 앤드류가 아시모프의 로봇공학 3원칙을 말하는 장면




  “더블 캐릭터(double character)”는, 두 개의 자아, 즉 원자아(原自我)와 원자아에서 분리된 또 다른 자아가 상반된 모습으로 현현된 것을 뜻하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의 양면적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기도 하고, 여성이나 남성의 양면적 모습, 나아가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모든 훌륭한 이야기가 그렇 듯,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하고,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되 통합된 존재로 회귀하게 하는 것이다. 메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더블 캐릭터를 이용했으며,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성의 두 가지 면을 이야기 하기 위해 더블 캐릭터를 이용했다. 한편,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은 인간과 로봇을 통해 인간성에 관한 더블 캐릭터를 제시한 뒤 이를 통합하기 위한 길을 제안한다.

        



  개인의 이야기를 위한 장치, 더블 캐릭터     


  우선, 『프랑켄슈타인』은 메리셸리 개인의 사회적 모습과 감춰진 모습의 이중성에 대한 고백이다. 『프랑켄슈타인』을 이러한 방식으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메리셸리의 가정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메리 울스턴고드윈(Mary Wollstonecraft Godwin, 1797~1851)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의 딸인 메리셸리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계모와 이복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 메리고드윈은 저명한 문학가였으며,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는 알려진 대로 여성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다.     


* 여성의 교육적·사회적 평등을 열렬히 부르짖은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작 〈여성교육에 관한 고찰〉(1787)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 쓴 원숙한 작품 〈여성의 권리옹호〉(1792)의 모태가 되었다. 〈여성의 권리옹호〉는 교육에 대한 것을 요지로 하고 있으며, 여성 자신의 자각을 중점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보기 위해 파리로 가 그곳에서 미국인 선장 길버트 임레이의 아내가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런던으로 돌아와 영향력 있는 급진주의자 모임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녀의 집을 중심으로 모인 이 집단에는 윌리엄 고드윈, 토머스 페인, 토머스 홀크로프트, 윌리엄 블레이크를 비롯해 1793년 이후에는 윌리엄 워즈워스까지 참가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은 전기작가들에게 늘 흥미거리였는데, 19세기의 전기는 그녀의 삶의 지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사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20세기말에 여성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울스턴크래프트는 많은 저서의 주제가 되었다. (다음백과 참조)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메리셸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성찰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를 문학적으로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리셸리의 계모는, 당시 살림을 하며 남편을 내조하고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과는 달리, 아버지와 함께 책을 읽으며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메리셸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했으므로, 메리셸리를 자기의 친딸과 차별하였다. 메리셸리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으므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존재에 대한 결핍이 있었지만, 따뜻하고 안정적인 아버지의 성품 덕에 그러한 결핍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모와 재혼을 한 이후에 그녀는, 계모와 이복동생에게 아버지의 애정을 빼앗겨 깊은 결핍감과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이러한 가정사를 고려하면, 메리셸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대한 불안과 아버지의 애정을 영원히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속 괴물은 메리셸리가 느꼈던 감정이 현현된 캐릭터이다. 메리셸리는 자신이 가정에서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창조주인 빅토르에게 버림받은 괴물을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 괴물 역시 메리셸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만들고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삶을 살며 따뜻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동경하며 그러한 공동체에 귀속될 수 있기를, 그러한 곳에서 환대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갈망하지만, 그러한 일은 언제나 실패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괴물이 한 다음의 말처럼 말이다. “내 친구와 친척들은 어디에 있는가? 내 유년기를 지켜본 아버지도 없으며,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축복해준 어머니도 없다. (···) 나는 무엇일까? 그 질문이 또다시 튀어나왔지만, 대답이라고는 신음뿐이었다.”(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프랑켄슈타인』, 문학동네, 161쪽)     


  위와 같이 철저히 소외감을 느끼는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빅토르를 향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 삶이 고뇌의 연속에 불과하더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이니 지킬 생각이다. 기억하라, 당신이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력하게 창조했다는 것을. (···) 기억하라, 내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나는 당신의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 잘못도 없이 기쁨을 박탈당하고 당신에게서 쫓겨났다. 어디에서나 축복을 볼 수 있건만, 오로지 나만 돌이킬 수 없이 소외되었다. 나는 자애롭고 선했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 나는 행복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다시 미덕을 지닌 존재가 될 테니.”(위의 책, 132~133쪽)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괴물의 절박한 사정은, 소외와 불안의 표출에 대한 메리 셸리의 절박한 심리 상태일 수도 있다. 즉, 메리셸리의 가정사를 토대로 그녀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해보면, 그녀의 소설 속 괴물은 그녀 개인 그림자인 것이다.  




  여성의 이야기를 위한 장치, 더블 캐릭터 

(이 부분은, 바로 앞의 글 <여성성과 불안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다음으로, 『프랑켄슈타인』은 여성의 분리된 자아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여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동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메리 셸리라는 여성의 소외와 불안을 고백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당시 소외당한 여성의 보편적 삶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지식과 자유에 대한 욕구를 억압당한 메리 셸리 자신의 특수한 삶에 대한 소설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괴물을 창조한 남성 빅토르는 지식과 자유에 대한 메리 셸리의 욕구가 형상화된 인물인 반면, 괴물은 여성으로서의 메리 셸리의 소외와 불안이 형상화된 인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리셸리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괴물을 당시의 여성 일반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메리 셸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괴물의 다음의 말은 조물주와 남성을 향한 말일 수도 있겠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의 어떤 존재와도 무관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나와 달랐다. 신의 손에서 나온 아담은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조물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행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존재였다. 더욱 탁월한 본성을 지닌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고 지식을 전수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웠다. 나는 사탄이 내 처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내 보호자들의 행복을 바라볼 때면 쓰디쓴 질투의 덩어리가 내 안에서 치밀었기 때문이다.”(위의 책, 173~174쪽) 그래서 괴물은, 나아가 메리셸리는 “비참한 신세가 된 불안한 유령처럼 섬 주위를 배회했다.”(위의 책, 230쪽)     


  이렇게 여성이 “비참한 신세”에 처하고 자신의 생(生)을 살아내지 못하고 불안하게 방랑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정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은 아담처럼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성, 즉 이성과 자유를 실현해야 하는 과제에 시달리는 한편, 그것을 실현하기 힘든 삶의 여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이야기를 위한 장치, 더블 캐릭터     


  마지막으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성의 이중성에 대한 성찰이다. 이 소설 속에서 빅토르는 결국 사랑과 도덕의 세계가 아닌 지식과 과학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추구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하며 죽어간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피조물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빅토르는 공부를 하기 위해 가정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간 후, 이전처럼 자기 가족을 떠올리며 안부를 묻고, 그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행복해하기보다는 점차 과학적 지식을 알아가는 것에 심취했고, 종국엔 과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마치 신처럼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렸다. 다음은 이에 대한 빅토르의 고백이다. “첫 성공에 상상력이 지나치게 흥분해버려서, 인간처럼 복잡하고 경이로운 동물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느냐고 의심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 현재의 시도가 적어도 훗날의 성공에 초석을 놓을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는 있었다. 계획이 아무리 장대하고 복잡하다 해도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될 수는 없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나는 인간 창조에 착수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야말로 이상적인 목표였다. 내가 최초로 돌파해 어두운 세상에 폭포수처럼 빛이 흘러들게 만들었기에, 새로운 종(種)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 헤아릴 수도 없는 행복하고 탁월한 본성들이 내 덕에 탄생하리라. 나만큼 자신의 감사를 받아 마땅한 아버지는 이 세상에 다시없으리라.”(위의 책, 66~67쪽) 이전의 빅토르는 사랑과 도덕이 조화한 인간에게 경탄했다면 이후의 빅토르는 과학적 지식이 깊은 인간에게 경탄했으며, 나아가 피조물을 창조한 자기 자신에게 경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그는 그가 동경하고 지키고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스스로 소외되었다.      

  

  빅토르가 위와 같이 변했다면, 빅토르가 스스로 소외시킨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괴물은 바로 빅토르의 빅토르의 그림자, 즉 그의 소외된 자아일 것이며, 나아가 당시 과학적 세계관에 경도된 사람들의 그림자, 즉 그들의 소외된 인간성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빅토르는 자기가 창조한 괴물을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을 나 자신의 생령(生靈)이었다.”(99~100쪽)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괴물의 다음과 같은 절박한 심정을, 소외된 인간성이 전하는 소리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 일말의 동정심을 허락해달라. 내가 한때 지녔던 미덕으로 이 한 가지만 요구하겠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 내가 인간 세계를 영원히 떠나 무해한 삶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을 응징하고 당신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악마가 될 것인지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다.” (···) 호기심도 있었지만 결심을 굳힌 건 동정심 때문이었다. (···) 그리고 처음으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의무를 생각하고, 사악하다 불평하기 전에 먼저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는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134~135쪽) 앞의 괴물과 빅토르의 말을 두고, “창조주”라는 표현을 “주체성”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사랑과 도덕의 주체로 다시 부할시키려고 할 때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를 토대로 본<프로메테우스>의 더블 캐릭터     

  

  빅토르와 괴물의 관계,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다룬 SF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 이해할 수도 있다. 괴물이 빅토르, 즉 인간의 그림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SF 영화에서 로봇 역시 인간의 그림자로서 과학기술 및 과학적 지식에 경도된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메리셸리의 소설은, SF의 시초로서 평가되곤 한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리들리 스콧 감독, 2012)에는 데이빗 월터라는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인간성에 대한 더블 캐릭터로 분석될 수 있다. 데이빗은 자기를 창조한 웨이랜드를 닮아 과학적 앎과 창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반면, 이후 데이빗에 대한 반성으로 제작된 월터는 마치 사랑과 도덕을 이해하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실제로, 데이빗은 탐사하러 갔던 행성의 생명체들을 모두 죽이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며, 행성을 탐사하러 온 대원들을 죽이거나 새영체 창조를 위한 숙주로 이용한다. 이렇게 생명체 창조에 혈안이 된 데이빗의 마음 상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 슈타인』에서 “저항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위의 책, 67쪽) “생명이 없는 진흙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겠다고 산 동물을 고문하던”(위의 책, 67쪽) 빅토르의 마음 상태를 닮아 있다. 또, 빅토르가 괴물을 창조한 후 했던 다음의 말은, 과학적 지식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데이빗과 인간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일 것이다. “새로운 종(種)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 헤아릴 수도 없는 행복하고 탁월한 본성들이 내 덕에 탄생하리라. 나만큼 자식의 감사를 받아 마땅한 아버지는 세상에 다시없으리라.”(위의 책, 66~67쪽)

     

  데이빗은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를 보며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낀다. 마치 괴물을 창조했을 때의 빅토르처럼 말이다. “나 자신의 권능 자체를 만끽하기도 하고, 권능의 효과를 생각하며 불타오르기도 하며, 생각 속에서 천국을 걸었습니다.”(위의 책, 287쪽)      


  하지만 데이빗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비정함이 작용한 탓도 있다. 자신을 창조한 웨이랜드를 비롯한 대원들이 자신을 완전한 도구로만 대하고, 언제나 인간과 로봇을 분명하게 구별지으려는 태도를 보였는데, 데이빗은 그때마다 소외를 느꼈으며,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그랬듯이, 자신을 창조한 인간이 자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보며 인간에 대한 파괴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그림자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스스로 소외시킨 인간성이 야기한 하나의 사건이다.             

  



  아이로봇의 '로봇 3원칙'을 통해 본더블 캐릭터의 통합 가능성       


  정리하면, 『프랑켄슈타인』은 메리셸리라는 개인의 더블이자, 여성의 더블이면서, 인간의 더블이다. 그렇다면, 메리셸리는 이 더블을 통해 무엇을 겨냥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인간성의 통합이며 이는 인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예전처럼 인류의 일원이라는 기분이 들었으며, 지난 일을 훨씬 더 냉정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위의 책, 230쪽)     

  그렇다면, 인류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실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이라는 SF 소설집은,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 “인류의 일원”으로서 기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인간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토대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면, 인간과 인간의 모상으로서의 로봇이라는 더블은, 통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보호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3원칙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좋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합당한 권위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의사나 직장 상사, 정부 기관, 심리 상담원과 동료의 말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고, 규칙을 따르고, 전통에 순응할 것입니다. 설사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안위와 편안이 손상되더라도 말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2원칙입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를 보호하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1원칙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따를 경우에 그는 로봇일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아이, 로봇』, 우리교육, 2019, 305쪽) 이 소설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과학기술시대의 인간의 더블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과 도덕의 주체로 실현시킬 것을 제안한다. 빅토르와 괴물로, 혹은 데이빗과 월터로 분리되고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자기 자신을 실현해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떤 원칙에 종속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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