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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May 03. 2022

서평. 여성성과 불안에 관한 이야기들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한강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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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_소외


  메리 셸리(Mary Shelly, 1797~1851)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여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동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메리 셸리라는 여성의 소외와 불안을 고백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당시 소외당한 여성의 보편적 삶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지식과 자유에 대한 욕구를 억압당한 메리 셸리 자신의 특수한 삶에 대한 소설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괴물을 창조한 빅토르는 지식과 자유에 대한 메리 셸리의 욕구가 형상화된 인물인 반면, 괴물은 메리 셸리의 소외와 불안이 형상화된 인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괴물이 자신을 창조하고 버린 빅토르를 찾아 그에게 한 말이다.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 삶이 고뇌의 연속에 불과하더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이니 지킬 생각이다. 기억하라, 당신이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력하게 창조했다는 것을. (···) 기억하라, 내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나는 당신의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 잘못도 없이 기쁨을 박탈당하고 당신에게서 쫓겨났다. 어디에서나 축복을 볼 수 있건만, 오로지 나만 돌이킬 수 없이 소외되었다.”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괴물의 절박한 사정은, 소외와 불안의 표출에 대한 메리 셸리의 절박한 심리 상태일 수도 있다. 


  메리셸리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괴물을 당시의 여성 일반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메리 셸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괴물의 다음의 말은 조물주와 남성을 향한 말일 수도 있겠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기존의 어떤 존재와도 무관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나와 달랐다. 신의 손에서 나온 아담은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조물주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 행복하고 번영을 누리는 존재였다. 더욱 탁월한 본성을 지닌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고 지식을 전수받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나는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웠다. 나는 사탄이 내 처지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내 보호자들의 행복을 바라볼 때면 쓰디쓴 질투의 덩어리가 내 안에서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물은, 나아가 메리셸리는 “비참한 신세가 된 불안한 유령처럼 섬 주위를 배회했다.”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_ 불안

  

  이렇게 여성이 “비참한 신세”에 처하고 자신의 생(生)을 살아내지 못하고 불안하게 방랑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지 못하는 사정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은 아담처럼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성, 즉 이성과 자유를 실현해야 하는 과제에 시달리는 한편, 그것을 실현하기 힘든 삶의 여건에 놓여 있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여성은 자신에게 던져진 상황과 자신에 대한 기대에 저항하고 극복할 수 없을까봐, 불안해하는 것이다.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 2002)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니나는 언니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 슈타인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여자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돼. 여자는 그저 존재하는 거야. 어떤 업적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도 여자는 존재할 수 있어.” “당신은 많은 힘들을 소유하고 있어요. (···) 그러나 여성들은 너무 많은 모험을 하면 그 힘을 잃어버리지요.” 언니와 슈타인에게 니나는, 각각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야. 그러나 만약 여자가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업적을 평가할 때 쓰는 척도 이외의 다른 것을 적용할 수는 없어. 남녀가 똑같은 거야." “그녀는, 그렇다면 나는 살지 말라는 얘긴가요? 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살았는데요?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언니와 슈타인에게 니나는 모험보다는 단순히 존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성이지만, 니나에게 자신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니나는 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당신은 나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고, 어떤 때는 성숙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을 기대합니다. (···)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성인 니나에게 사람들은 가정 내에서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존재 방식을 기대하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니나에게 자기가 당면한 과제는 자유 실현이며 탐구 대상은 삶 자체이다. 그래서 이것을 방해하는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니나에겐 중요한 과제가 된다. 나아가 니나는 이 과제를 해결하고 탐구 대상에 몰입할 수 없게 될까봐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사람들은 항상 조용함과 강인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것을 기대하지. 나는 무슨 견디기 힘든 불안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물론, 자유와 삶을 문제 삼기 전, 니나 역시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그리며 환상에 속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니나는 이내 그것이 찰나적인 것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므로 삶의 환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여성으로서 꿈꿀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것이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찰나적이므로 그녀는 여성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삶으로부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찰나적인 것은 불안정하므로 불안한 것일 수밖에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차라리 죽음을 자주 떠올렸다. 다음은 이에 대해 니나가 슈타인과 언니에게 했던 말이다. “멋진 순간이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읽었어요. 사랑을 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거나 혹은 어떤 진리를 발견한 순간이 그렇다는 군요. 그러나 그런 건 (···) 다시 빼앗기고 말아요. 이건 절대로 나에겐 충분치 못해요. 그래서 나는 죽고 싶어요.” 


  죽음을 떠올렸다가도 삶의 즐거움을 놓칠까봐, 니나는 불안해해야 했다. “나는 누워서 기다렸어. 죽음을, 아니, 죽음의 상태를, 배후를 기다리고 있었어. 처음에는 행복했어. 그걸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그 다음에 온 생각들이 나를 불안하게 했어. 앞으로의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르잖아? 누가 알겠어. 결혼할 수 있는 중요한 남자를 찾아낼지도 모르는 일이고. 유혹이 하나하나 다가왔어. 그것은 삶의 환상이었어. 즉, 니나는 여성적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떠올렸고, 죽음 앞에서는 삶을 떠올렸다. 




  한강 』_ 행복


  이렇게 자신의 생(生)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는 불안은 니나를 삶과 죽음 경계 어디쯤에 있게 했다. 니나와 같은 ‘사이’ 존재에 대한 고백과 니나를 불안하게 한 “멋진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찰나적인 행복에 대한 묘사를 한강의 『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가르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격벽 같은 것. 하지만 어떤 불순물도 없이 밝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택한다면, 갓 돌이 된 아이와 나란히 누워 맞았던 오래전 여름의 새벽일 거라고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 아침빛에 저절로 떠진 그녀의 눈이, 미리 깨어 있던 아기의 검은 눈과 마주쳤었다. 왜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기는 보채지 않은 채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아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이 담긴 웃음을 그녀는 그날 처음 보았다. 흔히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은 모성애가 아니라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사랑일지 모른다고, 신의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한강은, ‘그녀’의 시간을 ‘사이’에 위치시키면서도, 애매하지 않은 완전한 한쪽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느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루이제 린저에게는 찰나적인 체험이라는 점에서 불안정하다. 물론, 『흰』의 그녀는 이 사랑을 경험한 인물이며, 『삶의 한가운데』에서 위의 말을 할 때의 니나는 아직 그것을 상상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긴 하다.




  다시,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_ 자유


  니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환상은 자유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니나를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그리고 삶의 환상에서 구한 것은 자유의 환상이다. 자유의 환상 덕에 니나는 죽기보다는 살기를 택하게 되었다. “삶은 완전히 바보 같은 환상들로 나를 유혹하려고 했어. 나는 매우 불안했고 혼돈스러웠어. 그러나 그 다음에 내가 꿈꾸었던 다른 환상들이, 내가 자유의 환상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왔기 때문에 나는 다시 침착해졌어. 그러나 감히 죽음을 원하지는 않게 되었어. (···) 나는 지금 내가 원한 것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유리창에 기대서 울었어."


  니나에게 자유란 모든 육체적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여성의 육체라는 껍데기를 걸친 이 삶에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따라서 니나에게 자유의 이미지는, 죽음과 함께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죽음으로써만 육체적 껍데기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내가 죽는 꿈을 꾸었어요. 그것은 끔찍한 공포로 가득 찬 순간이었어요. (···)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을 뿐, 그 다음에 온 것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요. 나는 아주 거벼워졌고 날아다녔어요. 내 몸은 수정같이 보이는, (···) 아주 가볍고 밝은 물질로 되어 있었어요. 나는 점점 가벼워지고 밝아져서, 마침내 은색 공기로 만들어진 공 같은 것이 되었어요. (···) 이미 무한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을 때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힘들게 일으켜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하는 육체 말이에요. 한계를 가진 이런 육체적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나요?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는데, 우리가 동경하는 그런 자유가 있는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꿈에서처럼 “공기로 만들어진 공”으로 변신할 수 없으므로, 니나는 생(生)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의 이미지를 삶에서 실현하기 위해선, 삶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生)에 대해 니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생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는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야.” 자신이 실현해야 할 것은 이제 여성성이 아니라 자유로운 생(生)이므로 그녀는 생(生)의 본질을 실현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들로부터 도망한다. 그래서 니나는 아래와 같은 시에서 이러한 불안에 대해 절박하게 고백한다.       


오, 이 한번만은 나를 방해하지 마라. 

오늘 숲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수줍은 본질들이 있다. 

태곳적 앎을 성스럽게 말없이 고지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숲에서 걸어나온 것들. 

내가 말없이 어둠 속을 갈 때였다. (···) 

그런데 너희들, 너희 타인들이여, 방해하지 마라. 

이 한번만은, 아, 너희들이 나에게서 느끼는 그 수줍은 본질들을 방해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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