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인간은 왜 그렇게 설계되었을까 싶지만
인간관계에서 불편한 사람은 존중을 받는다. 직장, 학교, 가정 심지어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말이다. 선의에서 나오는 배려가 이른바 '호구 잡힘'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팽배하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그 이유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든 출세를 위해서든 여러 가지 이유로 '호구 잡힘'을 참아내야 했던 세대지만 개인의 안위와 행복이 더 중요해진 요즘은 개인주의라는 방패로 '호구 잡힘'을 막아내는 시대가 됐다. 따라서 "요즘 애들은 그래서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꼰대로 분류된다.
나는 이 '방패'를 좀 더 어린 나이에 깨달았던 것 같다. 사람을 잘 믿지 않았고 나에게 해주는 조언은 전부 나를 시기하거나(개뿔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잘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이 붙여주는 그 흔한 별명조차도 없었던 꽤 불편한 캐릭터였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처음부터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항상 친절하고 착하셨던 부모님을 보고자란 탓인지 늘 주눅 들고 타인에게 끌려다니는 '착한 사람 병(?)'에 걸렸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좋고 싫음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행위를 반복할수록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고 나를 존중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그 이후로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나를 불편한 사람으로 느낀다는 상황만 놓고 보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내겐 꽤 지인이 많다. 왜 그럴까 이유를 고민해봤다. 심리학자가 아니기에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워 예시를 들어보겠다. 학창 시절에 무서운 선생님의 호감을 사려 노력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매일 무섭게 학생을 다루던 선생님이 어느 날 한 번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면 괜스레 뿌듯해하는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마치 나쁜 남자가 베푼 한 번의 호의가 여성의 마음을 흔드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해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호의를 권리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꽤 많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남을 막대할 수 있는 권리'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권리 행사랍시고 상대방을 호구잡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나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회사에서 꽤 불편한 후배이자 선배다. 처음 후배들은 나를 보고 피하기 바빴고(지금은 좀 나아졌다..) 선배들 또한 나를 불편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회사에서 내 직무에 대해서는 꽤 인정받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회사의 거의 모든 제작물은 내 손을 거쳐 완성된다.) 나는 스스로 세운 관계 사이의 벽이 존중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벽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벽은 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 이런 방법은 회사에서 높은 곳까지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회사 등 어떠한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는 꽤 효과 있는 솔루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편한 사람이 되자. 좋고 싫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처음은 누구나 힘들다. 하지만 한 걸음만 움직이면 그다음 걸음은 좀 더 쉬워진다. 한 번 사는 인생, 타인에게 주도권을 주고 살지 말자. 그렇기엔 내 인생은 짧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