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만 지키면 관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자리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가까운 지인 외에 조금이라도 거리가 있는 사람과는 식사자리조차 가지는 것을 꽤 불편해하는 성격이다. 그렇기에 업무 상 함께 지내야 하는 회사 동료들과 어떤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내게 꽤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의 직장은 회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입사한 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팀 회식은 물론 자잘한 파트 회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동기마저 일찌감치 퇴사했기 때문에 동기 모임이라는 것도 가져볼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런데도 회식이 필요하다고? 그렇다.
회사에서 나는 감정표현이 거의 없다. 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감정표현이 그다지 조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즐거움을 마음껏 표현하다가도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짜증, 분노 등으로 즉각 표현하는 리더들을 보면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신뢰가 생기는 모습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돌아보니 감정의 동요를 크게 보이지 않는 것이 결국 조직생활에서 이점이 많았다. 내가 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회식을 하면 회사에서보다 가까운 자리에서 상대방을 대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술기운에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칭찬이든 불만이든 말이다. 술에 과해 선을 넘는 행위만 제외한다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 상대방과 꽤 가까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까움이란 어느 정도 선은 지키는 가까움을 말한다. 어느 자리에서는 상대방을 굉장히 신뢰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 상황이 오기도 하는데 정말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오랜 지인, 가족을 제외하면(물론 이런 관계도 경계해야 하는 시대가 왔지만) 선을 지키지 않는 관계는 그 순간 생긴 신뢰마저도 급하게 무너질 때가 많다.
내겐 현재 후배가 2명이 있는데, 그 당시 이 둘은 회사에서 아무 말도 없는 나를 굉장히 불편해했다. 인간적으로 싫어한다기 보다는 다가가고는 싶지만 어려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사수로서 가르쳐줘야 하는 부분 외에는 대화라는 행위가 일절 없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이 참 웃긴 게 어느 정도 불편함이 있어야 존중이라는 감정도 생기기 때문이다. 3개월이 지난 후 우연히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의 진행자 주최로 촬영팀 회식을 하게 됐다. 이날 함께 마신 맥주 한 잔이 나와 후배들의 관계에 꽤 큰 변화를 만들었다. 각자의 선을 지키며 그동안 서로에게 느꼈던 점을 비롯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졌다. 다음 날 조금 더 편하고 밝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후배들을 보며 그날 처음으로 그동안 과할 만큼 폐쇄적이었던 나 자신을 후회했다.
여전히 윗사람들과의 회식이 불편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직장 내에서 가장 가깝게 일하는 사람들과는 회식이 관계 회복을 위한 윤활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넘쳐나는 각박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서도 관계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또한 삶에서 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회식을 꺼려하겠지만 그래도 회식을 조금은 이용해볼까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