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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놀 May 18. 2022

해리슨 버저론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커트 보니것, 에프, 2018


완벽한 평등을 원하시나요?   

  

물론이죠.


해리슨 버저론이란 남자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는 미래의 남자입니다.

그 남자를 만든 사람은 커트 보니것이란 소설가입니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49년부터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혼자 습작을 통해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글쓰기 이론 따위는 없는 걸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그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를 잠옷 차림으로 바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작은 물고기를 찾거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흠모하듯 바라보고 있는 흰 바위 위의 소녀라고 상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요. 작가의 생각이 잘 표현된 말인 것 같네요.     

이제 <해리슨 버저론>이란 인물을 만나볼까요.

     

2081년,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대요.

모든 면에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았어요.

잘생기지도 않았고 힘이 세거나 빠르지도 않았고요.


어떻게 이런 세상이 되었냐고요?

‘평등을 위한 미국 핸디캡 부여 사령부’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랍니다. 대단한 완벽주의자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핸디캡’이 뭘까요?

예를 들어 평균적인 것을 벗어나거나 무언가 생각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갖가지 소리가 생각하는 것을 차단합니다. 사람들은 몸에 핸디캡 자루를 매고 있어요.


당신이 이 세계에 산다면 몇 개의 핸디캡 자루를 매고 있을까요?

머리 굴리지 마시고 바로 대답해보세요.

망설이는 이유 알아요. 똑똑할수록 무거운 산탄 자루를 들게 될 거 같지요? 맞아요.


해리슨 버저론의 아버지 조지는 20킬로가 넘는 산탄 자루를 매고 있어요. 그의 아내 헤이즐이 안타까운 마음에 자루에 구멍을 내서 납 알을 몇 개 꺼내자고 말했어요. 조지는 현명하게 대답하지요.

 “납 알 하나 꺼낼 때마다 징역 2년에 벌금 2천 달러”     

 4달러도 아니고 2천 달러. 헤이즐도 더는 권하지 못하겠지요?

 핸디캡 자루가 무거울수록 평균 이상인 사람이지요.

 그야말로 평등한 세상이네요.


말 잘하는 아나운서는 심각한 언어장애를 갖게돼요. 목소리가 아름답다고요? 즉시 사과해야 해요. 배우들은 정말 큰일 나겠지요. 온몸에 자루를 주렁주렁 매달고 코에는 빨간 고무공을 끼우고 눈썹은 계속 밀고, 가지런한 치아에는 뻐드렁니처럼 보이도록 검정 덮개를 씌우고 다녀야 해요. 상상해 보세요. 티모시 살라메가 온몸에 자루를 주렁주렁 매달고 코에는 빨간 고무공을 끼우고 눈썹은 사라지고 뻐드렁니에 검정 덮개를 덮은 모습. 그 모습이 이 시대의 평등이라네요.


모두가 평등해서 모두가 만족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 해리슨 버저론이 등장해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쳐요.

“나는 황제다!”

그는 고철로 된 핸디캡 장치들을 꽝하고 바닥에 떨어뜨려요.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는 장치에 단단히 채워진 자물쇠도 톡 부러트려요. 헤드폰과 안경을 벽에 부딪쳐 박살 냈지요. 코에 붙어있던 고무공까지 떼어 버리자 천둥의 신 토르도 울고 갈만한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나지요. 그는 황후를 선택하겠다고 말했어요. 한 발레리나가 일어섰고, 그녀의 핸디캡 장치를 모두 뽑자 눈부시게 아름다웠지요.


연주자들에게도 핸디캡 장치를 벗게 했고, 음악이 흐르면서 모든 법과 규칙을 무시하고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췄어요. 이들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어요. 바로 그 순간 핸디캡 부여 사령관이 두발을 쐈지요. 짧고 강렬했던 황제와 황후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어요.

그 순간, 버저론 네 집의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나가버렸고. 조지는 맥주 한 캔을 가지러 부엌에 갔을 때 핸디캡 장치에서 신호가 울리는 바람에 어지러워 잠시 멈춰 섰어요.

헤이즐은 울고 있고요.     


   “당신 울고 있었어?”

   “응.”

   “왜?”

   “잊어버렸어. 텔레비전에서 뭔가 정말 슬픈 장면을 본 것 같은데.”

   “어떤 장면?”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버려서 잘 모르겠어”

   “슬픈 일은 잊어버려.”

   “난 늘 그러는 걸.”

   조지의 머릿속에서는 대갈 못을 박는 전동공구 소리가 울렸다.     


"슬픈 일은 잊어버려" 위로의 말로 곧잘 쓰는 이 말이 이토록 슬픈 줄은 몰랐어요.

생각하기를 차단하면 머릿속을 뒤죽박죽 만들면 아들의 죽음도 잊게 되는 이 기막힘.

모든 면에서 평등한 2081년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울 수 없으니까 웃기는 것” 보니것의 말이에요.     

이런 생각이 드네요.

울 수도 없지만, 웃을 수도 없는 미래.

우리가 빼앗길지 모를, 어쩌면 벌써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을지도 모를 미래가 이 소설 속에 숨어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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