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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쌤 Dec 18. 2023

'자유'는 당연하지 않고 구속은 당연하다.

자유주의 시대의 올바른 자유정신에 대하여


  

 오늘 날 우리에게 '자유'는 가장 당연한 가치 중 하나다. 신을 죽이고 우리가 손에 쥔 것은 '자유'다. 과학과 문명을 통한 물질적 풍요와 안정의 성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새로운 시민 계급의 형성과 자유화, 민주화를 통해 우리는 전례 없는 자유를 얻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신체, 진로, 종교, 가치기준 등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며, 자유롭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내면 세계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우리는 그 특별함을 잃는다. 그렇다. 우리에게 '자유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의 추구가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우리 현대인의 생명력은 감퇴된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 의식은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는 당연해졌고, 오만해졌다. 이제, 아니 예전부터 인간은 자유를 어떻게 제대로 활용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누가 길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가 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 자유주의 시대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고뇌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에게 광명을 주리라 믿었지만 혼란에 빠져있다. 우리의 생존율은 높아졌지만, 생명력은 퇴보하고 있다.


'자유정신에 대하여'

 루소의 이 말은 우리에게 자유정신을 불어넣어 준다. 동시에 우리에게 너무 헛된 희망을 안겨준다. '자유정신'을 들은 이상, 구속 없는 자유, 자신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나는가?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잉태되기 전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날 것인가? 우리는 잉태될 때부터 자유가 없다. 더군다나 정말로 태어나버린 이상, 우리는 어딘가에 매여있을 수밖에 없다. 루소뿐 아니라 로크, 흄, 공리주의자들, 니체도 처음 받아들인다면 무조건적인 자유를 떠올리게 된다. 이 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는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맥락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것처럼 매여있는 사슬을 모두 단칼에 잘라버릴 수 없다.


 사슬은 당연하고 무조건적인 자유는 당연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사슬을 인식하고 떼어내고 싶다는 욕망이 '자유정신'의 시작이다.



'당연한 것들'과 '당연했던 것들에 대하여'


 '자유정신'을 인식하기 전 우리에게 주어진 사슬들은 '당연한 것들'이다. '당연한 것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대표적으로 부모, 인종, 국가, 시대 등이 '당연한 것들'에 속한다. 부모, 인종, 국가, 시대에 따른 문화와 관습 또한 '당연한 것들'에 속한다.


 '자유정신'을 인식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들' '당연했던 것들' 그리고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된다.




세 가지 인간의 유형에 대하여

 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중에 세 가지의 인간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자유정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유형이다.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유형은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인간이다. 주어진 삶의 조건들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 인간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유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다. 오히려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 유형을 흠모하고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 유형의 인간들에게도 불행이 있다면, 언제든 '자유정신'을 인식할 가능성이 있고 그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에게 매여있는 사슬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서는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없다.


 두 번째 인간 유형은 '자유정신'을 극단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무조건적으로 사슬에 대한 반대와 반감을 가지고. 모든 사슬을 잘라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그에게 타협이란 없기 때문에 가장 고통을 많이 받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잘라버릴 수는 없으며, 자르고 난 후에도 완전한 자유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극단적 자유정신에서 정신과 현실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고뇌가 최고조에 이른다. 결국 극단적 자유정신의 생명력은 감소한다.

 극복하려는 인간은 이카루스다. 이카루스들은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개를 만든다. 그러나 이카루스가 보여주듯, 결국 땅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카루스가 날지 못한 이유는 날개가 녹아내려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가 사슬을 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카루스 유형의 인간들은 자아에만 몰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 자유보다는 구속과 쇠사슬이 더 당연한 것임을 망각한 사람들이다. 이카루스적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태양을 이기고 하늘을 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쇠사슬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더 높이 오르려 할수록 중력은 이카루스들을 더 끌어당길 것이다. 자유를 위해 쇠사슬을 떨어뜨리려 하지만 도리어 쇠사슬이 더 무겁게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이 이카루스의 비극적 운명이다.


 세 번째 인간 유형은 '건전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용수철' 같은 사람이며 내가 앞으로 말해나갈 '자유정신'의 소유자이다.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이 중심을 잡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건강한 자유정신의 소유자는 삶에 대해 고뇌하느라 고통받지만, 그 여정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다시 '자유정신'을 인식하지 않고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용수철의 인간들은 실험을 위해 자기에게 매여있는 쇠사슬에게 말을 건넨다.  "쇠사슬아, 네 끈의 길이는 얼마나 되느냐?"하고 말이다. 하지만 쇠사슬은 답이 없다. 용수철 같은 인간은 최대한 멀리까지 뻗어나가 본다. 그러다가 목이 탁 막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간 유형은 자신의 쇠사슬이 어디까지 자신을 허용하는지 감각적으로 알아차린다. 이런 식으로 몇 번 실험을 하다 보면, 자신의 쇠사슬이 얼마나 단단한지, 좀 늘어날 수는 없는지, 점점 더 짧아지는 것은 아닌지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이 어느 정도의 노예 상태로 지내야만 하며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삶에 반작용하여 살아보려는 자들이 바로 세 번째 인간들이다.


건전한 자유정신의 소유자들


 결론적으로 현대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사슬들에 묶인 채로 내던져진 실존을 어떻게 자유롭게 살아낼 것이냐'이다.


 우리는 '건전한 자유정신'을 가지고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건전한 자유정신의 핵심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고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정신이다. 또한 도저히 잘라낼 수 없는 사슬에 대해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정신이다.


 끊임없는 자기 실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당연했던 것'과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들로 채워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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