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돌봄에도 때가 있다
극단적인 여름입니다.
올해 여름 제주는 비가 안 오는 마른장마가
계속되었습니다. 작물이 타들어간다가는 말을 경험하는데 풀은 아랑곳하지 않고 쑥쑥 잘 자라고 있습니다. 요즘은 일기예보도 맞지 않고 비가 갑자기 요란하게 오다가 (스콜) 해가 쨍쨍입니다.
산속 도로를 지나오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고 천둥도 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뽀송뽀송한 도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오랜만에 화단 정리를 하다 보니, 풀과 넝쿨식물이 수선화와 토란도 덮어버렸습니다.
토란은 잎이 참 예쁩니다.
가을이 와도 토란은 캐지 않고, 줄기만 잘라서 말려두었다가 먹습니다. 토란은 해마다 제자리에서 다시 돋아나 여름, 푸른 잎을 넉넉하게 펼쳐 보입니다.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상추, 부추, 루콜라, 땅콩, 당근, 먹기 위해 키우는 작물들은 타는 듯한 더위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습니다.
그 사이 덩굴풀과 이름조차 모를 풀들은 무서울 만큼 뿌리를 내립니다.
속수무책으로 여린 꽃들은 잡초에게 자리를 내주고 덩굴식물은 녹차나무도 휘감아 죽게 만듭니다.
때를 놓치면, 화단은 풀밭이 됩니다.
가만히 두면 가장 강한 것이 먼저 자리를 차지합니다.
제초제를 쓰지 않으니 달팽이들도 안심하고 자라납니다. 손톱보다 작은 달팽이들은 상추와 시금치, 호박꽃까지 야금야금 먹으며 어느새 우리가 먹는 골뱅이만큼 자랍니다. 달팽이는 대식가입니다.
어린잎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 처음엔 참 귀여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작은 애정은 고민이 되었고, 이제는 슬그머니 그들을 텃밭 바깥, 조금 더 먼 곳으로 보내게 됩니다.
공존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저 조금씩 나눠 먹자는 마음이었는데,
새들과 벌레들은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감, 대추, 블루베리, 포도, 무화과, 앵두, 체리사과…
햇살 머금고 자란 열매를 이제 좀 먹어볼까 싶을 때면 이미 새들과 벌레들이 먼저 다녀갔습니다.
함께 산다는 건,
때론 내가 덜 갖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올해도 어김없었습니다.
체리사과와 블루베리는 새들과 벌레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체리보다는 조금 더 크고, 사과보다는 훨씬 작은 체리사과는 작은 새들의 입맛에 꼭 맞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작은 새들이 먹는 모습이 귀여워 지켜보았는데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내년엔, 조금 다르게 해보려 합니다.
망을 씌워서 나도 체리사과, 제맛을 보고 싶습니다.
신기하게도 매실은 벌레도, 새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작물들이 이리저리 공격받는 사이, 대파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별 탈 없이 자라나 줍니다.
그런 작물들이 있습니다.
애써 돌보지 않아도, 말없이 자라주는 존재들,
한참을 지나서야 그 고마움을 알게 되는 존재들처럼요.
봄날, 처음으로 여러 개의 화분에 당근 씨를 심었습니다. 하루하루 초록 잎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기뻤습니다.
얼마 전부터 조심스레 뽑아본 당근은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 당근 특유의 향과 맛을 품고 있었습니다.
작지만 제 몫을 다한, 귀여운 수확입니다.
아침에 딴 토마토는 씻어서 냉동실에 보관합니다.
먹는 속도보다 익는 속도가 더 빠른 계절이라
토마토는 잠시 냉기 속에서 기다립니다.
내년엔 토마토를 조금 더 정성스럽게 키워보려 합니다.
무성하게 자란 곁순들을 제때 솎아주면
열매는 더 크고, 더 단단해집니다.
작년에는 타이밍을 잘 맞춰 곁순을 정리해 주었더니,
마트에서 파는 방울토마토처럼 탐스럽고 예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식감은 탱글탱글했고, 시중에서 사는 토마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고 달았습니다.
텃밭에서 배우는 것은, 기다림과 타이밍, 그리고 기쁨입니다.
올해는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곁순 제거를 미루다 보니 작은 방울토마토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렸고, 나는 그 생명력을 차마 자르지 못한 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결과, 무성하게 뻗은 가지들이 서로를 감싸 안고,
빠르게 자라난 잎사귀들은 텃밭의 질서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다시 썼습니다.
오늘, 열매가 없는 줄기들을 하나씩 잘라내며
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심했던 내 여름에, 말없이 자라주어 고맙다고도요.
텃밭에서는 자르기도 사랑이고, 돌봄은 때로 선택과 결단이라는 걸 다시 한번 배우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