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_00학번인 나에겐 대학 동창 모임이 있다. 모임 이름은 'NINE'. 대학 시절 내내 어울렸던 친구들이 9명이어서였다. 졸업식 이후 어느 날,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모임을 결성했다. 초대 회장과 총무를 뽑았고, 모임의 주기와 월 회비를 정했다. 회칙도 만들었다. 회장과 총무의 임기는 1년이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맡기, 결혼식이나 돌잔치, 장례식 땐 개인 부조금과는 별개로 회비에서 모임명의의 부조금 내기 등등. 그러자 누군가 물었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경우에는 일정 시기가 되면 얼마의 금액을 지급하자는 내용을 회칙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게 자신이 될 것 같다고 했고, 나머지 친구들이 너는 절대 아닐 것 같으니 걱정 말라며 웃었다.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업해 초대 총무를 맡게 된 친구가 모임명의의 계좌를 개설했고, 우리는 각자 그 계좌로 회비가 매월 자동이체되도록 설정해놓았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날 노란 카페 불빛 아래 테이블에 모여 앉은, 젊디 젊은 이십 대 중반이던 9명의 모습이. 테이블 위로 오가던 시답잖은 농담들과 미소들. 간간이 주고받은 진지한 대화와 이내 농담으로 이어져 터지고마는 환한 웃음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은 지난 3월의 어느 날 저녁 되살아났다. 모임원인 친구 한 명이 단톡방에 다들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안부를 물은 것이다. 단톡방에 초대된 사람은 총 5명. 모임이 결성되고 얼마 안 가 4명의 친구가 탈퇴의사를 전했다. 취업이 안 되어서, 불안정한 계약직이어서 월 회비가 부담된다는 이유가 있었고, 결혼과 동시에 해외로 나가 살게 된 이유도 있었다. 모임은 남은 5명으로 이어졌다. 엷고 가느다랗게. 회칙에 정한 것처럼 분기별로 만나지 못하고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고, 매년 돌아가며 맡기로 한 회장과 총무는 언젠가부터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5명 중 4명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모임은 더욱 흐지부지해졌다. 종종 한번 모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래야지 동의했지만 어쩐지 말뿐으로 끝났다. 서서히 연락도 줄었고 언제부턴가 이런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몇 년 전엔가 한번 모이자고 적극적으로 일이 진행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나갈 수 없다고 답한 뒤 연락을 피했다. 당시 나는 그 모임뿐 아니라 누구든 피했고 절망의 늪으로 침전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째 회장직을 맡고 있던 친구가 끈질기게 전화해 묻기에 털어놓았다. 아이가 아프다고, 많이 아프다고. 너희끼리라도 만나라고 하면서 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그후로 우리가 모이는 일은 없었다. 가끔 단톡방에 안부인사가 오고가도 나는 읽기만 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모이는 일은 없었지만, 5명의 회비는 꼬박꼬박 쌓였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임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그 회비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지난 3월 오랜만에 반짝 활성화된 단톡방에서 오고가는 대화를 나는 역시 읽기만 했다. 반가웠고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한 마음에 나도 대화에 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아프고,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아파졌고, 나 또한 여전히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전보다 조금은 받아들였고, 겉으로 보기에는 밝은 척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정도일까. 친구들의 대화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선에서 끝났다. 만나자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은 채 단톡방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읽기만 할 뿐 아무 대꾸 없는 나 때문에 모이자는 이야기로 진척되지 않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모임에 나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하고 웃을 수 있을까. 다들 내 상황을 궁금해 하면서도 선뜻 묻지 못해 내 눈치를 살필 텐데. 다들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들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나는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딸과는 달리 건강한 아이들의 근황을 듣게 되면 나는 또 한동안 박탈감에 시달리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단톡방에 인사를 남겼다. 다들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단톡방은 곧 활기를 되찾았다. 친구들은 내 별명을 부르고 안부를 물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별명을 보고 이상하게 용기가 생긴 나는 또 충동적으로 물었다. 우리 만나는 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톡들이 앞다투어 올라왔다. 언제가 좋을까? 어디서 만날까? 여기 어때? 줄줄이 올라오는 톡을 보면서 나는 조금 울었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애틋했고 슬펐다. 그날은 밤잠을 설쳤다.
오랜만의 모임은 3월의 마지막 날 시청역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뤄졌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예약한 친구의 이름을 대고 미리 준비된 테이블에 앉았다. 소개팅에 나온 사람처럼 옷매무새를 다듬고 거울을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친구 두 명이 들어오며 내 별명을 불렀고, 우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 친구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한번 안아보자.
감싸안은 우리는 울음이 터졌다. 벌게진 눈으로 서로 바라보다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곧 두 명의 친구가 왔고 음식이 나왔다. 와인을 마시며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물었다. 나는 아이와 내 이야기를 했다. 덤덤하게 말하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그리고 내 얘기를 경청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20년 전 싱그러웠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같이 캠퍼스를 거닐고, 같이 강의를 듣고, 같이 과제를 하고, 같이 시험공부를 하고, 같이 식당에 가고, 같이 술집에 가고, 같이 노래방에 가고, 같이 쇼핑을 하고, 같이 여행을 가고, 같이 웃고 울었던 그 때가. 그렇게 4년을 같이 보낸 뒤 각자의 자리에서 애써 살아냈을 삶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일렁였다. 20년 전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될 거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서로에게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던 그때의 우리는 참 많이 웃었는데.
_<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를 읽으면 새삼 깨닫게 된다. "안도하는 사이"인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에 어떤 삶이 펼쳐졌는지. 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될 우리는 얼마나 강하고 애틋한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렇게 살아낸 우리가 지금껏 얇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를.
_"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팔과 손을 어루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거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흔아홉 살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처음 만난 스무 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기분은 그랬다."(p.32)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일들, 쪽팔려서든, 기회가 없어서든, 정리가 안 되어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이야기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열거되었다."(p.196)
"택시에서 난주와 정은 미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창밖을 보며 또 이렇게 셋이 모이는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이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그럴 것 같았다."(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