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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랑 Feb 26. 2024

14년, 어느 희귀질환자의 진단방랑기

 당신을 알기까지 걸린 시간, 14년 혹은 1개월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드디어, 이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4년 전,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때입니다. 


식판을 들고 가던 중, 갑작스레 몸이 멈췄습니다. 


음식이 바닥에 쏟아지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어서 치우려던 행동도 잠시, 몸이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묘한 기분을 느끼는 찰나,


10초도 안될 그 순간이 1분보다 길게 느껴졌을겁니다. 


부모님과 함께 찾은 종합병원에서, 무어라 처방 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군대는 가지 못할거라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증상은 간단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작스레 몸을 움직이면 (가장 유력하게는 뛰면)


5~10초 동안 제가 원하는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치료도 간단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알약 하나를 먹으면 되었으니까요. 


그럼 증상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약을 2~3일 정도 잊으면 어느샌가 증상이 나타났지만요. 



어쨌든, 저는 쭉쭉 성장했고, 


스스로가 어떤 질환을 가졌는지 잘 모르는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어요. 






처음 몸을 제어하지 못한 때로부터 7년 뒤, 


그 시기 저는 심한 장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동네 병원에선 지사제와 여러 약제를 처방해주었고 


한창 바쁜 고등학교 1학년 시기였기에 '어서 나아야'했어요. 



대입을 앞두고 진로 탐색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고


주변 친구들과의 수학 실력 차이로 위축되던 시기기도 했습니다. 



할일도 많고 마음도 바쁜데, 


몸이 아파 시간만 축내고 있다는 생각도 잠시였어요. 


장염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동네 병원에서 받아온 지사제도 듣지 않고 다시 받아온 다른 약도 듣질 않았어요. 


도리어 화장실에서 피 섞인 변까지 보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혈변'은 꽤 심각한 증상이에요. 더 큰 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소위 '2차병원'으로 옮겨 대장내시경을 받았습니다. 


식단을 조절하고 장을 비우는 고역은 장염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장 내부에 선명한 염증의 모습을 보며, 


3차병원인 종합병원으로의 소견서를 받았습니다. 


조직검사결과 CD와 소견서를 챙겨 모 대학병원의 소화기내과로 향했고 


그때 비로소 제 질환을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궤양성 대장염' : 염증성 장질환의 일종으로 대장 끝부분인 직장 내벽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입니다. 



원인은 알 수 없고 완치도 불가능하다는 소식에 잠시 절망했지만 


이전 글에서 적었듯 '살아남는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역시나 약 복용으로 치유가 가능했고 


아침에 먹는 약이 하나 추가된 것으로 저는 점차 치유되었습니다. 


다른 희귀질환들에 비해 궤양성 대장염은 당시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였고 덕분에 확진도 수월했던 편입니다. 



환자 수가 늘어 덜 희귀해졌기에 중증 난치성 질환으로 분류가 격하되었지만 


여전히 완치가 불가능하고 증세 악화의 여지가 남아있어 '산정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치료비의 90%를 국가가 그렇게 지원해주었기에, 걱정을 그나마 덜 수 있었습니다. 





1개월간의 진단방랑 이후 또 7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었고 군대는 궤양성대장염으로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으며, 


그 시간을 의대 입시 준비에 활용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한 건강 조건, 그럼에도 유리하게 변하는 조건 등을 종합했던 선택이었습니다. 



어릴 적의 몸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증상은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디 이야기할만한 주제도 아니고, 


약만 먹으면 증상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갔습니다. 



학교 주변으로 병원을 옮겨와 받던 두 번째 진료였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산정특례 혜택이 가능할텐데 확진 절차를 밟아보겠냐고 하시더군요.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 / 발작성 운동유발 이상운동' : 소위 PKD 라는 추정 병명을 전해주면서요. 



14년간 이름을 모르고 통원만 하며 약만 받아갔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질환은 희귀질환 중에서도 더 발병율이 낮아 '극희귀질환'에 속한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선생님의 소견에 따라 일련의 검사를 받았고


오늘이 돌발성 운동유발 이상운동증으로 산정특례 등록을 마친 날입니다. 



그렇게 14년간 몰랐던 희귀질환의 정체를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같은 경우가 희귀질환 환자들에겐 적잖은 편입니다. 




감기 같은 질병에 비해 유병자 숫자도 적고, 


흔하게 접하는 질환이 아니다보니 쉽게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처음 증상을 겪던 시기에는 국내에 질환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았다가 


살아가던 도중 00으로 추정된다고 검사를 받고 


그제서야 정체를 알게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빈번합니다. 






아무튼 중증난치성질환 : 궤양성대장염과 


극희귀질환 : 돌발성운동유발이상운동증을 동시에 마주하게되며


코너로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산정특례에 등록되지 않은 희귀질환 유병 환우, 


수십년간 질환의 정체를 모르고 진단방랑해오며 부적절한 치료만 받다 


마침내 질환을 알게 된 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달라졌습니다. 



저는 다른 희귀병 환우 분들에 비해 생명이 위독하지도, 


금전적으로 코너에 몰려있지도 않습니다. 


약물로 모든 증상 관리가 가능하기에 일상에 지장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징징거리기에는 희귀질환으로, 진단방랑으로 


실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계신 희귀질환 환우님들이 많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희귀질환 환우들을 위해 오늘도 기도합니다. 


그분들의 몸이 평안하고 떨리는 마음도 평안을 찾을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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