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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LOH Sep 27. 2020

문장 수집가의 콘텐츠 영수증

9월 4주 차 - Content Receipt


2020/09/21 - 2020/09/27

≡ 9월 4주 차, 어서 오세요 무심하고 상냥한 정세랑의 월드로

콘텐츠에는 링크로 지름길을 열어두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이 글에서 나의 새로운 취향을 알아가실 수 있기를 바라며.




≡ 넷플릭스 오리지널 - 보건교사 안은영

평범한 이름과 달리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보건교사 안은영이 새로 부임한 고등학교에서 심상치 않은 미스터리를 발견하고, 한문교사 홍인표와 함께 이를 해결해가는 명랑 판타지 시리즈

 기다리고 기다리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습니다. 정세랑의 세계와 이경미 감독의 시선의 조합은 이렇게나 이상하고 아름답습니다. 무심하고 따뜻한 우리의 히어로 안은영. 이경미의 안은영은 조금 더 현실에 가깝습니다. 현실은 명랑하지 않으니까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운명처럼 업고 살아가는 안은영. 히어로의 무게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지를 여실 없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름'이 얼마나 힘든지도.


 입으로는 씨발 씨발.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학교를 구하는 명랑 히어로 안은영. 넷플릭스는 투명 비비탄 총세트를 굿즈로 내주세요. 허공에라도 비비탄을 쏘며, 혼자 열심히 싸우고 있을 안은영과 함께하고 싶다고요. 엉엉. 힘을 내요 안은영!





재화는 용기를 아홉 번 죽였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숨을 확실히 끊어놓았다."

≡ 정세랑 - 덧니가 보고 싶어

 주인공 재화는 장르소설 작가입니다. 용기는 오래전에 헤어진 재화의 전 남자 친구입니다. 그리고, 재화의 장르 소설에서 아홉 번이나 죽습니다. 이 책은 재화의 이야기, 용기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됩니다.

 재화의 이야기에서는 재화가 쓰고 있는 장르소설이 나옵니다. 용기의 이야기에서는 재화의 소설에서 용기가 죽을 때마다 용기의 몸에 소설에 일부가 글씨로 새겨집니다. 


 용기의 시선, 재화의 시선이 번갈아서 이야기되면서 두 사람분의 이해를 안고 책을 읽어 나갑니다. 그리고 두 사람분의 삶에서 나오는 좋은 문장들.

 재화는 교정지를 덮으며, 고전풍의 이야기를 쓰는 건 역시 즐겁다고 생각했다. 옛날 사람들처럼 편심片心, 촌심寸心단심 같은 단어들을 쓸 때마다 지잉, 하고 뭔가 명치께에서 진동하고 만다. 수천 년 동안 쓰여온, 어쩌면 이미 바래버린 말들일지도 모르는데. 
 마음을 '조각' 혹은 '마디'로 표현하고 나면 어쩐지 초콜릿 바를 꺾어주듯이 마음도 뚝 꺾어줄 수 있을 듯해서. 그렇게 일생일대의 마음을 건네면서도 무심한 듯 건넬 수 있을 듯해서. 언젠가 용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용기는 그 말을 초콜릿 바를 받듯 가벼이 받았었다. 재화의 마음, 꺾인 부분에서는 잔 가루들이 날렸는데. 마음을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할 때는 역시 진지해야 해. 재화는 먼 곳의 용기에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누구를 사랑하고 있든 간에 신중히 사랑을 말하길.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 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때때로 인생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고, 엉뚱한 것이 주어지는데 심지어 후자가 더 매력적일 때도 있다. 그렇게 난감한 행운의 패턴이 삶을 장식하는 것이다.
턱밑까지 찰랑찰랑하다가 버틸 수 없어 쏟아지고 마는 그런 고백 같은 것들, 너무 멀게 느껴졌지만 세상에 아직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형준의 귀에서 피어싱이 반짝, 빛났다. 재화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피어싱을 몇 바퀴 돌려 조이는 시늉을 했다.
"나사 풀리지 않게 버텨. 나한테는 그게 어렵더라."
 "언닌 정답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정답으로 지켜나가는 사람이니까. 난 누군가의 유사 답 정도는 되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정답은 못 되어봤네."
"그런 거 될 필요 없는 것 같아. 누구의 무엇도."
재화와 선이는 가벼운 포옹을 했다.
"그 말도 맞네. 언니는 행복할 거야."
"행복에 강박을 가지지 마. 그건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랬어. 다들 그 일시적인 상태를 또 가져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걸 거야."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좋았던 점은 정세랑 작가의 8가지 장르 단편과 장편 소설을 한 번에 본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도 좋지만, 재화의 이야기 속 단편들의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나중에 더 긴 이야기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나는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 미래의 사람들이 이 시대를 경멸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목소리를 드릴게요, 작가의 말

≡ 정세랑 - 목소리를 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정세랑의 희망적인 디스토피아로.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그 2020년, 정세랑의 첫 번째 SF 단편집이 나오기에 완벽한 해입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총 8편의 SF 단편이 모여있는 단편집입니다. 마음을 울린 문장들이 많고 오래오래 빠져들어서 읽었기 때문에 몇 가지 단편의 좋은 문장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1분의 1

 그런데 열한 명이 있으면, 한 명쯤은 마음에 들어오게 되어 있잖아요. 오빠 11이 그랬어요. 왜 11이냐면 제일 조용해서. 항상 열한 번째로 말하는 사람이어서. 오빠 11의 이름은 오기준. 기준 오빠였어요.

 기준 오빠는 필드에 다녀오면 작은 화석을 하나씩 제게 선물했어요. 그냥 지나가다가 "유경아, 이거 가질래?"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이에요. 자세히 봐야 화석 같은 돌멩이들이었어요. 자연사 박물관에 가면 기념품점에서 2만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한 화석요. 고사리 이파리가 흐리게 보일락 말락 한 것들 혜정 씨도 본 적 있죠? 저는 빈 초콜릿 박스에 그 화석들을 모았어요. 박스가 다 차기 전에 기준 오빠를 좋아하게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네, 그동안 저는 기준 오빠를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늘 생각했어요. 기준 오빠는 저의 기준이 되어버렸던 거예요. 누굴 만나도 그때 오빠가 내 손에 작은 돌멩이들을 쥐여줄 때의 친밀감과 충족감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펭귄 수컷처럼 돌을 선물하던 남자 때문에 제 나머지 연애들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언젠가의 저녁, 연선은 수용소 앞마당의 벤치에서 고작 맥주 두 캔에 취해 느슨하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경모의 담배를 뺏어 들고는 피우지는 않고 머리 위로 들고 공중에 연기로 그림을 그렸다. 혹은 글씨를 썼는지도 모른다. 춤을 추는 것 같은 동작이었지만 바라보는 내내 승균은 담뱃재가 연선에게 떨어질까 불안했고 그 노심초사가 무색하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용소가, 세계가 연선을 사랑해서 담뱃재조차 닿지 않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존재. 우주의 사악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는 모호한 존재. 연선을 만나러 갈 것이다. 찾아가면 그 알 수 없는 얼굴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겠지. 마취약이 들어올 때, 의사가 숫자를 거꾸로 세라고 했는데 승균은 전혀 엉뚱한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사랑이 일목 대상인 일목인처럼. 물거품이 될 각오가 선 인어처럼. "목소리를 드릴게요."
#리셋, 목소리를 드릴게요

 생각해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멸종, 다음 멸종, 다다음 멸종.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잘못 가고 있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언제나 은은한 구역감으로 있었다.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모닥불 가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기 전에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다. 궤도는 가까스로 수정되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있던 은박 담요를 덮고 잠들며 가끔 웃는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에. 기이한 종류의 경배 감에.

 현 사회의 문제를 미래사회로 투영하여 현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집어내고, 자연과 문명,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립니다. 그것도 아주 따뜻하게.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온기를 잃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세랑의 힘입니다.


 절망적이고 어두운 미래사회 그 기저에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작품 내 인물들의 순정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미싱 핑거와 점핑걸, 기준과 유경, 인간과 천사, 연선과 수감자들. 각자의 방법으로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 무해한 인물들. 그리고 함께 극복해나가는 마냥 불행하지는 않은 미래.

 그리고 결국에는 희망을 제안합니다.

'궤도는 바뀔 것이다.'

궤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커피프린스는 가장 뜨거웠던 내 청춘의 기록이자. 가장 뜨거웠던 그때의 우리. 한결같은 여름이다.

≡ 청춘다큐 다시 스물 - 커피프린스 1호점

어떤 사람에게는 첫사랑, 어떤 사람에게는 화양연화이기도 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그 주인공들이 13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커피프린스는 '한결같은 여름이다.'라는 표현이 꼭 맞는 드라마입니다. 9월에도 12월에도 언제든 저에게 여름을 불러오는 드라마입니다. 사랑을 하고, 거리를 좁히고, 오래된 시간을 새로이 나누는 화면 속의 주인공들은 한없이 뜨겁고, 거침이 없어 반짝반짝합니다. 

 다큐를 통해서 만난 배우들의 뒷이야기도 참 뜨겁고 밝았습니다. 슬럼프를 견디고, 부딪치고, 이겨내는 실제 배우들의 모습이 더욱 이 드라마를 좋아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저는 다시 커피프린스를 꺼내보려 합니다. 




 사람은 언제 기회가 올 지 몰라. 나는 근디 늦게 온거야. 인생, 사람 모르는거야. 나쁜 것도 소리없이 오지만은 좋은 것은 더 소리 없이 올 수 있어.
 야 실패는 아무나 하는 줄 아냐? 영리한 사람이 실패하는거여. 성공할 애들이 실패하는 거여.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꼭 지랄을 허더라고 허지 말라 하더라고. 그 새끼들 말 듣지말고 허고 싶은거 다해. 남의 박자에 맞추지 말고. 그는 X같은 박자라고 했지? 니 박자가 맞는 박자야.

≡ 박막례 - 드디어! 할머니가 처음 말해주는 인생의 비밀

좋은 게 참 많은 사람이라 매번 좋음이 갱신되지만, 9월에 본 콘텐츠 중 가장 좋았습니다.

 자기 계발서를 원래도 안 좋아하는 편이고, 마음에 드는 자기 계발서를 찾아도 이 사람이 아직까지도 성공하고 있는 상태인가를 항상 확인합니다. 나에게 주는 조언이 과연 유효한지, 당신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지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74세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의 조언은 항상 저에게 가장 공신력 있는 조언이 됩니다. 5:20초의 영상이니 한번쯤 꼭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70대, 인생 그래프가 롤러코스터급인 경험자의 값진 인생 조언이니까요.








Bambyeol's Comment.

추석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일 그만 할래 콘텐츠 더 볼래···.


9월 5주 차 - 소비 예정 리스트

① 알고리즘과 그날의 기분에 맡기도록 합니다.

콘텐츠를 보다가 샛길로 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주는 계획을 세우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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