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미술관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내가 살면서 한국의 거리에서 마주한 장애인의 3배를 일본에서 마주쳤다(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논외로 하고). 나는 그저 여행객으로 일본을 잠시 방문했을 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수치라고 생각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중 한 번은 미술관에서, 한 번은 사찰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났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즐기는 시각장애인
어느 무더운 여름, 나는 도쿄국립박물관의 본관에서 상설전을 구경 중이었다. 수묵화조차 진한 먹선으로 화려하게 그린 일본의 옛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등 뒤로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누군가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작가의 그림이라 무언가 배울 수 있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았다. 그런데 그저 작품에 그려진 그림이 어떤 모습인지를 세세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이런 걸 왜 구태여 일일이 말하고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 그런 그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젊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미술관에 온 시각장애인. 편협한 경험뿐인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광경은 신선한 충격으로 오랜 잔상을 남겼다.
사찰을 답사하는 시각장애인
이듬해 봄, 사슴공원으로 유명한 나라에서 사찰 답사를 떠났다. 사슴공원이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이 즐비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교토보다도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고즈넉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렇게 조용한 장소만을 돌아다니며 갓 피어오른 벚꽃을 즐기던 어느 토요일, 동선이 계속 겹치는 가족이 하나 있었다. 어린 딸, 아버지, 그리고 시각장애인 엄마로 구성된 가족이었다. 세 사람의 표정은 내내 따스한 봄볕만큼이나 밝고 온화했다. 딸과 남편의 목소리로 그려지는 사찰의 건물이나 그 안에 안치된 불상의 모습을 귀로 감상하는 엄마의 미소를 보니 내 마음도 왠지 따뜻해졌다. 다소 낯간지럽고 지나친 감동으로 연출된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 드리만치.
일본 드라마나 만화를 보면서 참 아기자기하게 '연출'되었다고 생각한 골목의 풍경이나 자연의 모습, 또 사람들을 이따금씩 실제로 조우하게 된다.
장애인이 미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장애인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즐길 수 있고, 장애인이 정계에 입문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추어 '일부일처제로는 불만족'해질 수도 있는 나라. 그 다양한 층위가 모두 바다 건너 이웃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니, 역시 일본은 맞추기 어렵게 미묘한 날씨 그 이상으로 가늠하기 힘든 다양성을 가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상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어차피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판국에 남을 온전히 이해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 자주 오는 외국인이 있다면, 그에게 비친 이 땅은 어떤 모습일까 새삼 궁금해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