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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연 May 24. 2021

내가 아는 명언이 가짜라고?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앙드레 말로와 반가사유상 이야기



앙드레 말로의 명언으로 유명한 "꿈 오랫동안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대학교 들어갈 무렵 알게 된 이후로 무척 좋아한 격언이었다. 몇 년 전 갑자기 원문이 궁금해져 열심히 찾아본 결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해석에 의해 그 진의가 상당히 와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위 문구는 말로의 소설 <왕도로 가는 길(La Voie Royale)>에 나오는 것으로 말라바르(Malabar, 인도 서남 해안) 지방의 속담이라고 한다. 프랑스어 그대로 옮기면 "Celui qui regarde longtemps les songes devient semblable à son ombre"인데 간단히 해석해보면 "꿈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닮게 된다"라는 의미이다. 즉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꿈을 좇다가 그림자 속의 환영에 갇히지 말고 꿈을 냉정하게 명상해 영원의 빛에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앙드레 말로


말로의 원문을 찾고 있던 당시 나는 간절히 바라던 일이 있었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 원문을 마주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런데 '진실'을 알고 나니 바라고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생각했다. 앙드레 말로가 한 말이 아니라고 해서 저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내가 그려온 꿈에 꼭 닿고 싶으니까, 몽상에 불과하다 해도. 말로 영감은 "예술은 반-운명(L'art est un anti-destin)"이라고 했다. 내 인생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반-운명적으로.




그나저나 말로는 왠지 국내에서 유독 '곡해 인용'되는 인물인 것 같다. 우리나라 국보로 잘 알려진 금동반가사유상과 관련해서도 교차 검증할 수 없는 앙드레 말로의 일화가 한국에서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국보 83호라고 하는 바로 그 불상이다. (유물, 유적에 수인번호처럼 숫자를 붙여 명명하는 것에 개인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 편의상 기록해둔다. 사실 이 전통이야말로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것인데 유독 국보는 번호를 외우는 게 애국처럼 여겨지는 신기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일설에 따르면 1962년 이 불상은 두 번째 '월드투어'를 진행 중이었다. 금동반가사유상이 해외 순회 전시 중 파리 세르누치 박물관을 찾았을 때 앙드레 말로는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앙드레 말로는 두 시간 동안 전시를 본 후, 그 유명한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일본 고류지 목조 미륵반가사유상


이 '전설'은 바리에이션이 하나 더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금동반가사유상을 꼭 닮은 일본 고류지(広隆寺)의 반가사유상을 보고 말로가 "일본 열도가 물속에 가라앉을 때 한 가지만 건지라면 이 반가사유상을 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 작품은 일본 국보 1호이며,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말도 종종 첨언된다. 또는 앞의 전설과 이 전설을 한 데 묶어, 말로가 지구 멸망의 날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꼭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식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 모두 한국의 웹사이트나 몇몇 서적 이외에는 아무런 자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어, 프랑스어뿐 아니라 일본어로도 근거가 될 만한 텍스트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지도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사진을 고르는 앙드레 말로의 모습


한 번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 부존재를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 앙드레 말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반가사유상은 충분히 독보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우리는 꼭 누군가에게, 특히 다른 나라의 누군가에게 기대어 자신의 사유나 존재가치를 입증받아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단편적인 문장이나 일화조차도 어떤 목적에 의해 편집되거나 윤색되기 일쑤이니, 긴 글이나 두꺼운 책에 적힌 내용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로 작성되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의심'이라기보다는 '비판적 수용'의 자세로.




한 가지 더 웃긴 이야기. 앙드레 말로의 반가사유상 운운하는 이야기를 할 때도 종종 동양의 美 및 불교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의 소설 <왕도로 가는 길>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꿈을 오랫동안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오역나온 바로 그 책 말이다. 한국에서 이 책은 <La Voie Royale(왕도로 가는 길)>에서 <La Voie Fausse(바보가 되는 길)>로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지구가 멸망할 때 금동반가사유상을  말로가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꼭 구해주겠다고 다짐한다. 말로가 다르게 생각할지언정, 나는 꿈을 오랫동안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난 믿고 싶다.



세줄 요약
1. 쉽게 얻은 글을 믿지 말자
2. 쉽게 쓰인 글을 믿지 말자
3. 이 글도 엉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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