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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연 May 30. 2021

예술은 가난에서 나온다?

옛 화가들은 얼마를 벌고 어떻게 살았을까



'예술가'라 하면 흔히 다락방에서 전전긍긍하는 굶주린 인간상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유명한 작가들이 편지 속에 남긴 현실에 대한 불평 가득한 목소리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물론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의 화가들은 엄청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미술시장이 발달하기 이전이라면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도 왠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며 예술혼을 불태우다 죽은 후에야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만 같다. 17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독일 출신의 화가 아담 엘스하이머(Adam Elsheimer, 1578-1610)가 남긴 스케치는 그러한 예술가의 절망을 담은 듯하다.


아담 엘스하이머, <절망에 빠진 화가(The Artist in Despair)>, 1603년경, 개인 소장


제목 그대로 작품은 절망에 빠진 화가를 그리고 있다. 화가는 왜 절망에 빠진 걸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힌트는 화가가 몸을 기댄 책상 위에 놓인 천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면 오른쪽 한 구석을 지배하는 이 작은 천사의 한 팔은 돌에 짓눌려 아래로 처진 일종의 불구 상태이다. 이 도상은 16세기 중반 출판된 안드레아 알치아티(Andreas Alciatus, 1492-1550)의 도상집에 소개되어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다. 천사의 아래에는 "가난은 가장 위대한 재능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즉 천사가 한쪽 팔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무거운 돌은 가난으로 인해 예술가가 느끼는 삶의 무게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 엘스하이머는 지금이나 그때나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런 그가 이런 그림을 남겼던 것을 보면 어지간히 수입 상황이 좋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록을 살펴보면 엘스하이머는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해 감옥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엘스하이머는 대체 얼마나 어렵게 지냈던 것일까?



17세기 로마의 화가들은 왜 '가난'했는가?


엘스하이머의 안타까운 생을 통해 화가들의 어려움을 살펴보려고 하니, 자연스레 관심은 엘스하이머의 그림이 어느 정도에 팔렸나, 팔리기는 했나, 하는 부분으로 향한다. 후대의 가격이 아니라 엘스하이머 활동 당시의 가격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림에 '정가(定價)'를 매기기란 쉽지 않다. 같은 작품이라도 언제 누가 어떻게 거래하는지에 따라 값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엘스하이머가 활동했던 시기와 가장 가까운 가격을 찾아본다면, 그의 성 십자가 제단화는 약 3,000 스쿠디 정도에 팔렸다고 한다. 17세기 로마에서 대학 교수나 의사의 연봉이 300 스쿠디 정도였다고 하니 상당한 가격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화가의 연봉 계산은 단순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작품에 따라 제작 기간이나 제작 비용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엘스하이머가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는 현재로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엘스하이머와 관련된 기록을 훑어내려가다 보면, 그가 1년에 집값으로만 60 스쿠디를 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로마에서 최고급 거주지의 1년 임대료가 100 스쿠디였고, 고급 거주지로 평가받았던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 dei Monti) 인근조차도 40 스쿠디 전후였다고 하니 엘스하이머가 얼마나 고급스러운 생활수준을 영위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즉 엘스하이머의 '절망'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에서 왔던 것이다.


카라바지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1593-94


좀 더 널리 알려진 작가로 눈을 돌려보자.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3-1610)는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에 매우 가까운 작가이다.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인간적인 인물들의 극적인 카라바지오의 작품은 분쟁과 충돌로 가득한 작가의 생애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오죽하면 기록마다 입을 모아 카라바지오의 인간됨을 두고 "극도로 이상하다(stravagantissimo)"는 평을 남겼을까. 그런 카라바지오의 명작은 과연 얼마쯤이었을까?


카라바지오, <점쟁이>, 1595년경


17세기 로마의 미술상이었던 지울리오 만치니(Giulio Mancini, 1559-1630)의 기록에 따르면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은 1.5 스쿠디, <점쟁이>는 8 스쿠디에 팔렸다고 한다. 만치니는 카라바지오가 이렇게 형편없는 값을 지불받았다는 일화를 '충격적'이라고 소개하였다. 분명 이는 카라바지오가 좀 더 명성을 얻은 후의 가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1.5 스쿠디나 8 스쿠디도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다. 카라바지오가 이 두 작품을 한 달 동안 작업했다고 하면 대략 1년에 100 스쿠디 정도를 벌 수 있는데, 1600년경 로마에서 5인 가구가 1년에 90 스쿠디로 적정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카라바지오는 젊은 독신자였으니 이 정도 수입은 오히려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카라바지오, <엠마우스의 저녁>, 1602-3


특히 후기에 가면 카라바지오의 그림값은 더욱 높아져서 <엠마우스의 저녁>은 150 스쿠디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록상 카라바지오가 받은 최고 금액은 메시나의 <예수 탄생>과 <나자로의 부활>로 1,000 스쿠디였다. 이러한 작품 가격을 통해 카라바지오의 활동 후기 평균 연소득은 1,000 스쿠디 정도인데, 이는 당시 우수한 화가가 받을 수 있었던 연봉이다. 즉 카라바지오는 적어도 말년에 이르면 이미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좌: 카라바지오, <예수 탄생>, 1609년 | 우: <나자로의 부활>, 1609년경


보헤미안과 같은 이미지와 달리 카라바지오의 실제 경제생활은 로마라는 세계 중심지의 엘리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1603년 카라바지오는 피렌체 궁전 근처에 커다란 집을 임대하고 매년 40 스쿠디를 지불했다고 한다. 엘스하이머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 40 스쿠디는 고급 거주지의 임대료 수준이다.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1638년경


로마에서 명성을 쌓은 화가라면 누구나 유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에 걸맞은 생활수준을 누리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일삼거나, 안정적인 자산의 투자 관리 방법에 무지했다. 당대 드물게 여성으로서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았던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 또한 딸의 결혼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느라 파산을 했다며 후원자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17세기 로마의 화가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무능했는가?


그렇다면 화가들은 모두 자산 관리 능력이 없었던 걸까? 그에 대한 대표적 반례가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조각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이다. 이들은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예술적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평생 유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루벤스도 후원자에게 돈이 부족하다며 불평이 가득 담긴 편지를 적어 보내기 일쑤였다. 1606년 29세의 루벤스는 지금 받은 140 스쿠디로는 두 명의 시종이 딸린 저택에서 생활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작품 주문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20대에 이미 루벤스가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베르니니의 유산은 40만 스쿠디에 달했다. 17세기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20년 동안 봉직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과연 오늘날 로마를 만든 베르니니다운 경제력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사학에서는 '예술작품'을 '돈'과 관련해 논의하는 것을 터부시 했다. 그러나 예술가도 인간이다. 두 명의 시종이 딸린 140 스쿠디 짜리 저택을 얻기 위해 루벤스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이런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루벤스, <발리첼라 세폭제단화(Vallicella tryptic)>, 1606-8


예술가들에게 그림값은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창작의 원동력이었다. 가격은 매우 현실적으로 책정되었다.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바로 구에르치노(Guercino / Giovanni Franesco Barbieri, 1591-1666)이다. 구에르치노는 경제 문제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십여 년에 걸쳐 매우 상세한 회계 장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1629년부터 1666년까지 약 40여 년에 걸쳐 매년 평균 1,500 스쿠디를 벌었던 것을 보면 구에르치노는 상당히 인정받은 화가였다. 말년에는 부동산 투자로 20%의 수익을 남길 정도로 이재에 밝았던 탓일까, 그는 작품에 들어가는 인물 크기를 기준으로 작품의 가격을 미리 산정했다고 한다. 구에르치노가 책정한 기준에 따르면 전신이 다 드러나는 인물은 100 스쿠디, 반만 드러나는 인물은 50 스쿠디, 머리는 25 스쿠디를 그렸다고 한다. 어떤 이가 80 스쿠디를 내면서 인물 전신을 그려달라고 하자 구에르치노는 냉정하게 "반보다 조금 더 그린 인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아래 그림은 250 스쿠디가 될까?


구에르치노, <수산나와 장로들>, 1617


"화가가 영광을 얻고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면 편안하고 부유한 것이 나은가, 아니면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나은가?" 17세기 로마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만치니는 편안하고 부유한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작품의 양보다는 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가격이 더 높을수록 경애하는 나리께서 마음에 들어하실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제가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649년 아르테미지아는 후원자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하다 못해 당돌하게까지 느껴지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가난에서 예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17세기 로마의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여본다면, 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예술가들의 사회경제적 측면을 통해 작품을 보다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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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바로크 미술사학자 Richard E. Spear의 논문 "Scrambling for Scudi: Notes on Painters' Earnings in Early Baroque Rome"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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