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딩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인쇄와 제본, 쉽지 않아
지난번 게시물에서 소개한 대로 진행 중이던 텀블벅에서의 독립출판 펀딩,
http://www.tumblbug.com/lettersfrommuseums
2주 동안 225분의 후원을 받아 619%의 초과 달성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막판 며칠은 추석 연휴라 후반부 판매는 거의 포기하고 홍보도 중단했는데
감사하게도 연휴 기간에도 100% 정도 추가 후원이 이루어졌다.
(집필진 모두 단톡방에서 연휴 내내 매일매일 지켜봤다는 후문)
본래 계획은 후원해주신 독자분들께 최대한 빨리 책을 보내드리고자
연휴 전 출판 관련 사양을 모두 결정하는 것이었다.
연휴 마지막 날 주문 수량이 나오는 대로 인쇄소에 발주를 넣고
연휴 끝난 다음 날 굿즈 관련 구체적인 발주 사항을 확정하여
10월 첫째 주까지 발송을 마치려는 대계획이었다.
그래서 첫 단계로 연휴 직전 충무로 인쇄소를 방문했다.
독립출판 인쇄의 첫 번째 벽, 인쇄소 선택
우리가 이용하기로 한 업체는 충무로에 위치한 태산인디고.
우리가 독립출판 인쇄소로 태산인디고를 선정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1. 우리 출판사 대표님이 이전에 이용했던 업체이고
2. 다른 대안을 모색해봤으나 예산에 맞는 곳이 드물었는데
3. 예산에 맞는 곳 중 태산이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인터페이스, 업무처리속도, 선택지 등)
보통 인쇄소는 우리 같이 독립출판을 하는 초보자들에게 불친절하다고들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쇄 쪽에 전문 지식이 많이 필요한데
초보자들은 그런 지식이 전혀 없으니까 업무 능률을 떨어뜨리겠지.
게다가 태산 인디고는 24시간 근무체제이니 직원분들이 피곤하실 테고.
다만 상담을 위해 태산인디고 본사를 직접 방문했을 때
그런 불친절함은 전혀 느끼질 못했고 오히려 굉장히 잘 대해주셔서
감사하게도 여러 가지 결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태산인디고에서 샘플 인쇄를 진행한 후로도
불안병이 있는 나는 이곳저곳 다른 업체를 알아봤는데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현재 우리 사정에는 태산인디고만한 곳이 없다는 결론.
(태산인디고를 추천해주신 공백 출판 대표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독립출판 인쇄의 두 번째 벽, 종이 선택
그러나 인쇄소의 결정 문제는 독립출판 인쇄 단계에서는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했으니
본격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단계는 종이 선택.
사실 나는 나를 믿었다. 그리고 우리 필진들을 믿었다.
어릴 때부터 화가인 엄마 옆에서 곁눈질로 적지 않은 종이를 접하며
종이 선택에 어설프게나마 경험이 있었던 나 자신을 과신했다.
내가 못하더라도 미술사 전공생 중에서도 센스가 남다른 동료들이라면
감각 있게 종이를 잘 골라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마음에 드는 종이가 없다면 따로 입고시키자는 야심까지 세웠던 우리.
그러나 실제로 종이를 보아도 아무런 감이 생기질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종이를 고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 종이를 골라서 여기에 우리의 글을 인쇄해 두툼한 제본을 했을 때,
저 종이를 골라서 여기에 표지 이미지를 뽑아 전체를 덮었을 때,
대체 어떤 느낌이 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한참을 우왕좌왕한 끝에 우리가 고른 종이는
표지 랑데뷰 울트라 240g 단면 무광코팅 날개 있음,
내지 미색 모조 100g, 면지 몽블랑 160g 앞뒤 1장 추가였다.
태산인디고에 점심 먹고 맡겼는데 감사하게도 당일 오후까지 만들어주셔서
완성된 샘플 본을 찾아들고 낙성대역으로 돌아와 팀원들과 책을 펴보았다.
사실 팀원들과 함께 보기 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하철에서 책을 보았다.
실물로 받아보면 정말 감동의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데 웬걸,
샘플북을 받아보고 느낀 첫인상은 이러했다
책 같지가 않아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지금도 우리의 미스터리이긴 한데,
무언가 미묘하게 시판되는 책 같은 느낌이 나질 않았다.
내 일에는 눈에 불을 켜고 깎아내리며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일까,
한 권에 2만 원이나 주고 좋은 옵션을 다 넣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첫 작품은 어설픈 독립출판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디자인이라는 건 정말 한 끝 차이로 결정된다고들 하던데
그 말을 이번 독립출판 준비 과정에서 처절하게 느꼈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지인이 많아 현직 유명한 디자이너를 소개받았는데
예산을 너무 과하게 초과해서 계약을 맺지는 못했지만 조건을 보니
디자이너와 인쇄소를 함께 방문할 수가 있었는데
그 조건이 왜 들어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북디자인은 1mm, 2mm의 싸움.
처음 독립출판을 경험하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종이 두께 10g, 20g, 무광 유광 여부 등에 따라서도
결과물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출판 세계의 벽.
책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끝에 현재의 문제점을 분석해보았다.
1. 유광이 싫어서 선택한 모조지의 한계
지난번 공백 출판에서 낸 책은 광택이 있는 뉴플러스지인데
광택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모조지를 선택했다.
모조지에는 백색 모조와 미색 모조의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백색 모조는 글을 읽는 사람의 눈에 불편하지 않을까 하여
미색 모조를 골랐는데 미색 모조는 보통 100g까지밖에 나오질 않는다.
(한솔재지인가에서는 120g까지 나오는데 태산인디고에서 쓰지 않음)
모조지를 보통 80g으로도 쓴다고들 하니 100g이 그리 적은 평량은 아니고
지난번 공백 출판의 『남겨진 것들』도 뉴플러스 미색 100g을 썼다기에
100g이면 괜찮겠지 했는데 웬걸, 같은 100g이라도 같은 두께감이 아니다.
모조지의 재질 특성상 코팅된 뉴플러스보다 훨씬 얇고 가볍다.
날리는 듯한 종이가 주는 한없이 가벼운 느낌은 책 전체를 가볍게 만드는 듯만 했다.
뒤가 많이 비치는 것도 그림이 많이 들어간 우리 책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광택이 있는 뉴플러스에 비해서 도판 인쇄도 선명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할 때 책의 1/3에 도판이 들어간 우리 책에
모조지는 썩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광을 포기하고 뉴플러스라는 현실적 선택을 하거나,
무광을 고집할 거라면 반누보나 랑데뷰같은 고급지를 써야 한다.
2. 두꺼운 표지가 야기한 날개 들뜸 현상
생각보다 펀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독립출판 예산의 여유가 생겼다.
이 예산을 우리는 우리의 이윤으로 남기기보다는
최대한 좋은 퀄리티의 책을 제작하는 데 쓰고자 했다.
그래서 대형 출판사와 계약하는 파주의 인쇄업체도 알아봤는데
이쪽은 소형 인쇄소의 2배 정도 되는 비용을 불러서
여기와 계약하면 오히려 책 퀄을 떨어뜨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하드커버로 제작할까 하는 논의도 있었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제작 기간, 표지 재디자인 등의 문제가 발생해 포기.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하드커버 (및 사철 제본) 제작의 아쉬움을 갖고 있었고
"두꺼운 표지가 고급진 표지다"라는 무식한 생각으로
우리 책 표지도 일단 최대한 무거운 종이로 주문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했던 게 바로 랑데뷰 울트라 240g.
그런데 날개가 있는 표지의 종이는 이렇게 두꺼우면 안 된다.
안으로 접혀 들어간 날개가 붕 떠서 표지가 붕 뜨고
그렇게 해서 책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고 집을 수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집어 들고
날개 들뜸 현상을 확인하고 표지 두께를 가늠해보았다.
우리 책처럼 두꺼운 종이를 표지로 쓴 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우리는
현재 종이학 석사 입문이 가능한 수준의 공부를 재진행한 후
여러 건의 테스트 샘플을 재주문하여 다양한 시도를 진행 중이다.
최종 결과물은 내일에나 받아볼 수 있는데
제발 이번에는 하나라도 건질만한 조합이 나와주길 바랄 뿐이다.
독립출판 인쇄의 세 번째 벽, 제본
이것도 정말 울고 싶어 지는 이야기인데,
우리 디자이너님께서 여백을 3mm로 잡아주셨는데
태산인디고 쪽 기계와 뭐가 잘 안 맞는지
글이 전체적으로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나왔다.
문제는 태산인디고 측 홈페이지 설명을 보면
내지 여백을 3mm 정도로 설정하라고 한다는 것.
대체 그럼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 도저히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내지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많다.
1mm, 2mm 차이로 이렇게 느낌이 확확 다를 줄이야.
책의 세계는 정말 어렵고도 복잡하다.
그 외에도 세네카를 11mm로 예상하고 디자인을 했는데
이놈의 미색 모조 100g으로 만들고 나니 실제 결과물은 9.5mm 정도라
책등 디자인과 테스트 샘플 책등 두께가 맞질 않았다.
아마 이 점도 우리가 테스트 인쇄물을 받아봤을 때
시판되는 책 느낌이 아니라 어설픈 인쇄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던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 제본의 세계도 공부하다 보니 정말 끝이 없었다.
우리가 선택한 제본은 무선제본이고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방식인데
무선제본의 단점을 보완한 제본으로 PUR 제본이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이것을 추진하자고 제안해보고 싶었는데 우리 책이 184페이지로 얇아서
PUR의 장점은 최소화되고 단점만 남는 꼴이라 포기했다.
태산인디고에서는 하드커버 제작 시 PUR 제본이 자동으로 되니
하드커버로 제작하면 딱이긴 한데,
아까 말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없지 않지만
184페이지짜리 얇은 책에 하드커버를 하는 것도 좀 웃기지 싶다.
불어 터진 라면 먹는데 JL Coquet 그릇 꺼내놓은 느낌?
오히려 글을 웃기게 만들 것도 같고, 독자들이 보기도 불편할 듯하다.
(사실 나는 사철 제본을 하고 싶었는데 이건 태산인디고에서 안 해서.)
독립출판 인쇄의 네 번째 벽, 오탈자
나는 2년 동안 KCI 등재 학회지 간사를 혼자 역임한 적이 있다.
사회평론이라는 훌륭한 출판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런 경험 덕분에 오탈자 잡아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혼자만의 자부심이 있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집필진 중에는 후배 간사들도 두 명이 더 있었고
그 외에 다른 집필진도 모두 꼼꼼하고 똑똑한 친구들이라
다 같이 여러 번 교정을 보며 . 하나 , 하나 띄어쓰기 한 칸마다 공을 들였는데
내가 간사를 하며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오타는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다 찾아낼 수가 없다.
이번에도 정말 대체 왜 못 봤지? 싶은 말도 안 되는 오류들을
인쇄 후 책으로 보면서 뒤늦게 색출해 냈다.
curly quotes로 되어야 할 부분이 straight quotes로 되어있다거나,
em dash로 되어야 할 부분이 hyphen으로 되어있다거나.
(사실 몇몇 hyphen은 서구권에서는 en dash로 쓰는 거라 바꾸고 싶기도 하다)
심지어 표지에 em dash가 hyphen으로 잘못 들어간 걸 뒤늦게 보았을 땐
정말 울고 싶었다. 내가 눈 감으면 모두 편안히 모르고 넘어갈 텐데
난 왜 눈이 달려있을까 휴
텀블벅 펀딩까지는 어렵게 마무리했는데,
왠지 앞으로 할 일이 지금까지 할 일 보다 많은 듯한 불안감이 든다.
독립출판, 다시 하라면 절대 안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한 번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 클라우드 펀딩 학사, 제본학 학사, 종이학 석사, 교정학 박사는 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