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혀진 기준에 대하여
귀여움도 코르셋인가요?
1. 맞다.
탈코를 하고 난 후, ‘귀엽다’라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짧은 머리를 보고 사람들은 이제 예쁘다- 대신 귀여워- 라고 하더군요. 특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나 평소 연예인, 친구들의 외모를 아무렇지 않게 평가하던 사람들이 내 머리를 보고 귀엽다- 라고 할 때 그 말이 듣기 거북했습니다. 어떤 말로 하든 간에 외모 평가는 그 의도가 다분합니다. 제 껍데기를 상품으로 소비하는 겁니다. 우리가 탈코르셋 한 후에 느낀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샀던 옷들, 화장품, 각종 액세서리, 구두.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잘 전시된, 누군가 사가길 기다리고 있는 바비인형처럼 만들지 않았습니까? 사탕 껍질, 선물 포장지 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이 ‘예쁘다’며 반응을 보일 때 그간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까? ‘귀엽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끝끝내 탈코르셋을 하고 기본형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코르셋을 씌우는 겁니다. ‘예쁨’이 없어진 나를 이제 ‘귀여움’으로 소비하려는 의도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쁨과 귀여움은 여성 혐오적 시선이 가득한 우리 사회에게서 그리 다르지 않은 의미로 소비됩니다. ‘예쁨’이 최고의 가치로 소비되는 것일 뿐, ‘귀여움’, ‘귀여운 여자’. ‘애교 있는 여자’ 같은 키워드도 충분히 여성 혐오적 시선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지양하고자 하는 것 중 대표적으로 ‘애기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애기처럼 말하는 말투입니다. 쓸데없이 받침에 ‘ㅇ’을 붙인다거나, 의도적으로 딱딱해 보이는 말투(기본형의 말투)를 피하고자 쓰는 말을 ‘애기어’라고 합니다. 또, 아동복 같은, 유아틱한 옷을 입고 아기처럼 행동하는 것도 있습니다. 실제 아동이 입는 것 같은 사이즈와 몸을 다 덮지 않는 길이의 옷, 볼 터치를 과하게 하는 화장도 의심할 여지 없이 코르셋입니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지켜주고 싶은’ 같은 형용사들도 여자 앞에 주로 붙습니다. 왜 여자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입니까? 이는 명백히 가부장제의 시선에서 출발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로 심각한 건 예쁨보다 귀여움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귀여운 여자’라고 검색해 봤습니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단발의 여성 연예인들이 입술을 모으고 있는 사진이 다수 나옵니다. 그사이에 적지 않은 비율로 충격적인 사진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 사진’입니다. 어린이가 비키니를 입고 있는 사진이 왜 ‘귀여운 여자’라는 검색어에 걸리는 걸까요? 아동복 모델이라 칩시다. (비키니가 어린이의 옷은 아닙니다. 어른들의 무식함 때문입니다.) sns에 올라온 여자 어린이의 셀카 사진도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물론 ‘귀여운 남자’라고 검색해도 간간이 남자 어린이 사진이 나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키니를 입거나 벗고 있는 사진은 없고 셀카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시커먼 남자 연예인들(연하남, 키링남으로 소비되는 연예인, 주로 아이돌. 그런데 마동석도 나왔습니다.)이 훨씬 많이 나옵니다. ‘여성 혐오는 아래로 흐른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남자아이의 귀여움은 그저 아이이기 때문에, 어른으로서 느끼는 아이의 귀여움이고 여자아이에게 쓰이는 ‘귀여움’은 어른-아이 관계에 남자가 여자를 보는 시선이 더해진 것입니다. ‘애기어’, ‘보호 본능’과 같은 맥락으로 여성은 아기나 어린이처럼 약한 존재이며 (아기처럼) 귀여워야 하고, 애교가 있어야 하며 남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귀여움’은 여성 혐오적 단어입니다. 모든 여성은 귀여워지는 것을, 귀엽게 소비되기를 멈춰야 합니다.
2. 아니다.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여러분은 언제 ‘귀엽다’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친구가 애기어를 사용할 때? 아동복 같은 옷을 입고 왔을 때? 아마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귀여움’은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변질된 의미의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코르셋 논쟁이 계속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썬크림은 코르셋입니까? 이제 막 탈코르셋을 시작하는 과정에 있는 여성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셨을 겁니다. 비비크림이나 베이스를 썬크림으로 대체하면서 이것도 과연 코르셋인가? 아니면 나는 자외선 차단을 위한 크림을 바르는 것뿐인가.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코르셋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썬크림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미백 기능, 노화 방지, 베이스 기능, 수분 보충 기능 같은 ‘자외선 차단’이라는 썬크림의 주 기능 말고도 ‘꾸미는 여성’, ‘화장하는 여성’을 위한 기능들을 썬크림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기능들이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결국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썬크림은 ‘자외선 차단’이라는 주 기능의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여움의 의미도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귀여움이 어떤 모양이든 간에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귀여움만을 소비하라고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사회는 여성의 선호도까지 규정짓습니다. 여성은 항상 예쁘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본래 내가 가진 선호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회로부터 규정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 동물이 좋고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것은 제 선호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성인 친구들과 함께 동물병원 앞을 지날 때 유리창 너머에 있는 아기 고양이를 보고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귀엽다며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을 겁니다. 혹은 ‘여자들 다 고양이나 강아지 좋아하던데.’ 같은 말에 자신의 여성성을 의심하며 ‘나도 좋아해야 하나?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해 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여움 혹은 귀여움에 대한 선호도는 개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여성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썬크림을 바르는 것이 코르셋인가 고민하는 것처럼 강아지를 보고 귀여워하는 것이 코르셋인가, 귀엽게 행동하고 귀엽다고 말하는 것이 코르셋인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기도 전에 코르셋을 입고 그것이 마치 내 피부인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경계가 모호해져 자주 헷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탈코르셋 이후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성이 무뚝뚝할 수 있고 날카로울 수도 있고 냉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고 아기자기한 볼펜이나 인형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더는 사회가 규정한 귀여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귀여움을 소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여성에게 ‘귀엽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 나빠야 할까요? 사회가 규정한 귀여움을 더는 소비하지 않는 여성이 느끼는 귀여움은 코르셋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이 저는 껍데기를 벗은 본질적인 귀여움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짧은 머리를 해서도 아니고, 애기어를 사용해서도 아니고, 여자는 귀여운 것을 소비해야 하므로 강아지를 귀엽다고 말해서도 아니고, 이런저런 여타의 이유 없이 드는 감정. 그것만이 본질적인 의미의, 그리고 우리가 소비해야 할 귀여움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