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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Jul 19. 2020

페미니즘 담론; 탈코르셋

강요가 아닌 설득, 비판 이전에 격려, 신뢰하는 마음으로



 처음 머리를 자르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나는 힙합을 꽤 좋아해서 힙합 경연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거기 나온 래퍼가 전부 남자였고, 전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걸 보다가, 갑자기 엄청난 부러움을 느꼈다. 짧은 머리로 그냥 그렇게 서 있는 게 옳아 보였고, 좋아 보였고, 자유로워 보였다. 따라서 나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를 자른 후에도 나는 똑같이 화장하고 등교했다. 그러다가 화장을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연스레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입술 색에는 집착했었는데 그조차도 점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나는 탈코르셋의 모든 과정을 나의 의지로 겪었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자책이나 분노, 힘겨움의 감정들은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정체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의 압박이나 강요에 못 이겨 등 떠밀리듯 탈코르셋 했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비판한다는 생각에 반발심을 가지고 반페미니스트적인 행보를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탈코르셋이 페미니스트의 필요조건처럼 돼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나의 화장한 친구가 여성 인권 상승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그를 ‘진정한’과 ‘그렇지 않은’으로 잣대질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그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내재적으로 탈코르셋에 대한 내 생각을 명확히 해야만 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탈코르셋이 여성 인권 상승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답게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들과 같이 그저 ‘사람’으로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는 타인의 요구에 따라 짜여진 ‘여성형’에 맞춰 사람보다는 먼저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강요한 여성형을 따르면 ‘정상’, 여성형을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결혼, 임신, 화장, 긴 머리, 마른 몸 등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바둥거렸던 이유도 비정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코르셋은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형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바꿔서 여성에게 어떠한 패배감도 느끼지 않게 하려 한다. 이때, 여성은 남성의 모습으로 바뀌려는 것이 아닌, 인간의 기본형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며, 이미 남성들은 그 기본형을 어떤 사회적 압박 없이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었다.


 탈코르셋을 하면서 수많은 옷과 화장품들을 다 버리고 차림이 간소해지면, 놀랍게도 더 다양한 내가 보인다. 코르셋 상에 갇혀 이런 스타일 저런 스타일 운운하는 것만큼 우물 안 개구리가 없다. 우물 밖으로 나와 인간으로 지닐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바라봐야 한다. 성격, 특징, 능력, 꿈과 같은 것들. 어떻게 그 많은 인간이 전부 ‘예쁨’으로 향하는 좁은 문으로 달려가며 다양성을 운운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여성은 여성을 너무 모르고 있다. 세상이 나를 알아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탈코르셋을 하면 나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다고, 그 경험은 웜톤과 쿨톤의 몇 가지 색 체계로 나를 판가름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탈코르셋을 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사실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탈코르셋은 어렵다.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어떤 담론이 등장하면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거나, 가끔은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비겁하게 모른 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코르셋은 겉모습에서 벌써 그 사람의 입장이 드러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혼자서 충분히 생각하는 과정을 빼앗길 수 있다. 난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단계인데, 곧바로 ‘쟤 화장했네? 페미 아니네?’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의 ‘필요조건’을 충족하기를 바라는 주위 시선에 의해 어영부영 확실한 판단 없이 탈코르셋을 수행하게 될 수 있다. 또, ‘여성 인권 상승’이라는 내재적 목표와 ‘코르셋을 차고 있는 내 모습’이 인지 부조화되면서 마음이 더 급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몸으로 직접 겪어낸다는 실천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어려워도 여성들이 그것을 해내는 것이 옳다고 믿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변화를 내가 독려하고 싶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게 내 머릿속의 오랫동안 고민이었다.


 나는 탈코르셋이 옳다고 믿고, 그와 동시에 탈코르셋의 궁극적 목표에는 결국 여성 인권 상승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여성 인권 상승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과 연대해야 함도 잊지 않았다. 이때, 더 많은 여성과 연대함을 놓치지 않으면서 더 많은 여성을 탈코르셋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비판과 강요가 아닌 격려와 설득이라 생각한다. 물론 발전과 개혁의 과정에는 비판이 필요하다. 나아가려 함을 기억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과정에는 비판과 검증과 실천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해서 그런 과정을 거쳐 가야 할 여성들에게, 사실은 여태까지도 사회가 규정한 여성형에 의해 끊임없이 검열과 감시와 비판을 당해오고, 그것마저 모자라 스스로 족쇄를 채워온 여성들에게, 우선적으로 비판과 강요의 방법을 쓰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나는 그리하여 더 많은 여성에게 더 많은 칭찬을 해주고자 한다. 여전히 머리가 길지만, 자신이 원하던 여성상이 여성에게 더 큰 노력을 강요하는 하나의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깨달은 친구에게, 아이돌을 좋아했지만 이제 더는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고 나의 미래를 위해 주식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친구에게, 나는 기꺼이 그들이 옳게 행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최대한 많이 말한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점에 대해 주눅 드느라, 스스로 깨닫고 실천한 부분의 대단함을 잊을까 봐, 그리하여 자신감을 잃고 포기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여성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의견을 내고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으로 대화한다. 설득은 말의 뉘앙스에 따라 강요로 느껴져 거부감이 들 수 있기 때문에 격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이후에 설득이 와도 늦지 않다.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우리가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 맛있는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부탁하려고 하는 건, 밥 한 끼가 상대의 신념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기 보다 상대의 듣는 태도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생들도 엄마에게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 때면 생전 부리지도 않던 애교를 부린다. 우리가 밥을 사거나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칭찬하는 것쯤은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들이 나아진 부분에 대해 격려 한마디 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는 모든 여성을 신뢰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들이 저지르는 반여성 인권 상승적인 행동이 결코 자신이 강남역에서 이유 없이 죽어 나가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긴다. 여성은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들을 위한 발걸음에 그들이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본 적 없는 길이 두려울 뿐이다. 얼마 전, 원래 화장품을 모으는 것을 아주 좋아하다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화장을 그만둔 나의 친구는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고 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또 입 아프게 칭찬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그 믿음과 비교하여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난과 비판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의 목소리가 아닌 설득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파악하여 탈코르셋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성 인권 상승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언젠가 여성은 여성의 곁으로 돌아온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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