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관점으로 보는 여성서사
영화와 책은 대중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즐기는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나 작품의 중심은 남성에게로 치우쳐있다. 여성은 사랑받거나, 예쁘거나, 어머니거나, 섹시해야만 작품에 등장할 수 있다.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남성과의 관계 속의 존재다. 우리는 작품에 등장할 수 있는 어떤 요건도 충족시킬 마음이 없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고 남성에 억지로 감정이입해 몰입하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서사는 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문화생활을 위해 절실하다. 더 많은 여성서사를 함께 즐기고, 여성 창작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 코너를 마련했다. 언제나 중심에서 한 발 밀려난 여성에게 포커스 맞춘다. 현실에서든, 작품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여성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fiction
파과
2013.08 출간
구병모 저자
난 그쪽 어머님이 아니에요
어딜 가도 ‘어머님-’ 이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나이의 주인공 ‘조각’은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매번 이렇게 말한다. “난 그쪽 어머니가 아니에요.” 그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멋쩍게 웃거나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냐는 듯 쳐다보는 정도에 그치지만 그제야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낯선 중년 여성에게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에 조금만 더 주목해 보면 그만큼 여성의 삶이 단편적이고 획일적이었다는 반증이 될수 있을 것 같다. 그 나이 때 그런 모습의 중년 여성은 보통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 익숙한 호칭일 것이고 부르는 내 입장에서도 간단한 예의는 차린, 저기요- 나, 그쪽- 보다는 적당히 친근감도 섞인 그야말로 합당한 호칭일 것이라 많은 사람이 맘대로 생각해 버린 결과이다. 그래서 ‘조각’이 사실대로 ‘난 그쪽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면 나름대로 최선의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상대는 묘한 억울함과 함께 ‘그 나이에 무던하지 못하고 공연히 남들에게 화풀이하는 꼰대 할머니’라 생각하며 뒤돌아 작게 욕지거리를 뱉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사실을 말했던 지와는 관계없이.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며 아내도 아니고 빨래나 설거지 같은 내 몫보다는 훨씬 많은 집안일에 지쳐 있지 않고 낮 시간을 동네 아주머니들과 화투 치며 수다 떠는 것으로 보내지 않으며 곁에 누구도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어머니라고 무례하게 부른 남에게 무던하게 지나치지 않고 나는 네 어머니가 아니라고 당당하고 쌀쌀맞게 이야기할 수 있는 중년의 여성은 사회에겐 그저 돌연변이다. 조각의 ‘난-아니에요’ 발언이 머리를 띵하고 맞은 듯한 느낌과 함께 통쾌한 이유는 사회와 가부장제가 침묵하는 영역의 누군가가 평온하다 못해 지루한 연못에 무심하게 던지는 돌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깨진 과일의 의미
제목이 ‘파과’다. 중간중간 썩거나 깨진 과일이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뭔가 상징하는 게 있겠거니 하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꽤 비중 있게 나온다. 그 짐작에 내 시각의 해석을 더 해 나름대로 파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225p>
늙은 과일은 조각의 처지와 비슷해 보인다. ‘부서진 조각’이라던가 ‘손톱 (조각의 별칭)으로 긁는다.’ 같은 어절에서 늙은 과일과 현재의 조각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은 색깔이 선명하고 싱싱했던 최고의 시절을 냉장고 안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보냈다. 조각이 그걸 사와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그 최고의 시절의 복숭아가 궁금해진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조각의 삶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어디쯤 있었는지 지금의 조각은 찾고 싶지만, 알 수 없을 것이다. 점점 기능이 떨어져 가는 자신의 신체 능력과 그로 인한 실수들, 이제 그만 하세요- 라는 의미의 은근한 강요와 연민이 뒤섞인 시선. 그런 지금의 것들만 눈에 확실히 보이고 최고의 시절 같은 건 통째로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집히지 않는, 냉장고에 들러붙은 부서진 복숭아 조각들을 하나씩 건지며 텅 빈 기분을 느껴야 했을지도 모른다. 지저분하게 으깨져 치워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실수가 잦아도 일을 떠나고 싶지 않으며 강 박사에게 어떤 애정을 느껴 먹지도 않는 과일을 사버린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들과 다를 게 없어 보여 눈물을 흘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들어있는, 그 원형을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이제는 음식물쓰레기로 버려질 그것들을 보고 자신도 언젠가 이렇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사라지는 그날을 상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342p>
주어진 상실을 사는 것. 어쩌면 우린 매 순간 만나는 상실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 온전한 과일만을 바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틈이 생기는 조각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빈틈없이 방역 상대를 처리하던 조각에게 점점 틈이 생긴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강 박사’를 그냥 살려두고, 리어카를 끌던 할아버지 때문에 방역 타깃을 놓쳐도 그를 무시하기는커녕 목표물을 따라가지 않고 얼굴까지 드러내면서 할아버지를 도와준다. 결국 조각은 그 타깃을 제거하지 못한다. 조각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고 그의 일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실수다. 틈은 어디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다. 나이가 들면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건 맞지만 그에 비례해서 마음도 나약해지는가, 에 대해선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변의 노인들을 봐도 그런 법칙을 발견할 만큼 뚜렷하게 마음의 나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승곡선을 그려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는 특정 부류에 ‘마음 약함’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미디어와 책, 영화에서 여자의 연약한 마음을 주제로 한 콘텐츠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연약한 마음이란, 쉽게 울고 상처받는다는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가진 엄마의 기본 덕목처럼 거론되는 ‘뜨거운 모성애’, ‘눈물 나는 엄마 마음’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엄마 이야기만 하면 괜히 눈물이 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엄마가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신체적 감정적 노동이 ‘엄마’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라는 사회적 지위 앞에는 ‘헌신적인’, ‘희생하는’, ‘늘 미안한’ 같은 형용사가 붙는 것이 자연스럽다. 엄마가 되기를 강요하고 엄마의 약한 마음 즉, 모성애를 부여하는 건 가부장제 사회다. 그리고 이 모성애는 어머니의 나이가 들수록, 자식이라 부를 수 있는 개체가 많아질수록 더 강해지는 것처럼 부여된다. 젊은 엄마보다는 중년의 엄마가 더 눈물 나고 할머니가 더 마음 아픈 존재라며 마치 그들이 나이가 들수록 ‘본능적인-실제로 본능인지는 알 수 없다-’ 모성애 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소비하게 만든다. 따라서 나이 많은 중년여성은 어딘가 심정적으로 약해져 있다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조각에게 틈이 생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자식이 없는 그가 자식뻘 의사에게 갑자기 모성애가 생겼을 리 없고 리어카 할아버지를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봉사 마인드가 급작스레 생겼을 가능성도 적다. 그저 한 사람의 심정적 상태가 변화한 것이라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만약에 조각이라는 캐릭터와 이 책 전반부의 내용을 남작가가 집필했다면 뒤의 인질로 잡힌 강 박사의 딸아이를 구하러 가는 부분에서 조각의 ‘그릇된 모성애’를 강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에 낳았던 아이를 입양시킨 기억을 떠올리며 제 자식에게 다하지 못한 모성애를 강 박사의 딸 ‘해니’에게 투영시켜 마치 끝끝내 버릴 수 없었던 ‘끈질긴 모성애’ 때문에 아이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로 잘 포장되어 쓰여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책에서는 그런 식의 흐름을 단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조각이 아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투우-아이를 납치한 인물-’ 와 싸우는 장면에서는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눈물 나는 모성애는 이 책에 한순간도 없다. 모성애라고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게 ‘여자의 연약한 마음’이 아닌 ‘고독한 삶에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인간적 면모’로 해석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파과>는 60대 여성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이다. 60대, 여성, 살인청부업자. 이 세 단어가 나란히 놓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가슴이 뛰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낯선 만큼 새롭고, 진부함을 느낄 새 없이 페이지는 넘어간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주는 쾌감도 물론 그 재미에 포함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견고하고 튼튼한 짜임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서사도 흔히 ‘알탕영화’라고 불리는 뻔한 조직범죄 영화만큼이나 긴장감 넘치고 짜릿하며 ‘멋’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 혐오적 시선이 거의 없는 여성 중심 서사에서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방식의 재미와 감동을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꼭 영화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범죄/액션/누아르 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뻔하지 않은 여성 서사 누아르 영화에 항상 목말라하기 때문이다. 긴박감 넘치고 거친 액션과 냉정하고, 이성적인, 범죄에 능한 주인공의 서사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동안 느끼지 못한 새로운 흥분이 이 책에 있다. 같이 읽고 그 흥분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