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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Sep 25. 2021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BCN 〰 DUB. 02

2020

0226

Day2.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기(2)>


지금은 러시아 상공, 어딘가를 날고있어. 잠을 자도 자도 도착하지 않아. 생각해보니 여행하며 처음하게 될 일들이 꽤 많을 것 같아. 바르셀로나까지는 5시간51분 정도 남았어.


지금와서 드는 생각인데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 앞으로 인생에 우울하고 슬픈 일들은 없었으면 좋겠어. <멜로가 체질>에 은정이처럼 시크하고 도도한 삶이 멋있다 싶은데 한주처럼 바보같고 순수해도 일만큼은 프로페셔널하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진주처럼 남자 앞에서 당당하고 쿨한 척 할 줄 아는 사람도 되고 싶고. 온갖 거 다 퍼주면 넌 대체 뭐가 남겠어?? 네 마음이 가엾지도 않니?


내실이 단단하고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여행에 다녀오고 난 다음의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어떤 여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앞 장들에서 2017년 전 남자친구와 나의 목표가 적혀 있는 걸 봤는데. 그땐 몰랐지. 그 사랑이, 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거든. 이렇게 매몰차게 끝이 날 줄 몰랐지.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이 조금 걱정이긴 했다, 만 그 걱정 모두 쓰레기였구나를 실감했다. 마스크를 쓰고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사람이었고, 바르셀로나 공항은 평화와 여유 그 자체였다.


공항에 도착해 Aero Bus티켓을 먼저 구매했다. 숙소가 있는 곳까지는 공항에서 3정거장 밖에 되지 않았다. 티켓을 사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빅터에게 연락을 했다. 빅터는 Urgell St.에 내리면 숙소까지 오는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답을 해왔다. 큰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 버스에는 한국인 여자친구들 3명도 함께였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금세 시내에 닿았다. 에스파냐 광장을 지나고, 카탈루냐 국립미술관 야경과 콜럼버스 기념탑이 보였다. 그런데 버스가 정류장 마다 서긴 서는데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해 구글맵을 켜고 현재 내 위치를 계속 보며 어느 지점에서 내려야 할지를 체크했다. 하지만 내가 내리기로 한 Urgell St.를 한참 지나 두 정거장 앞에서 내리고 말았다. 숙소까지 1.3km.


길 찾기에는 생각보다 자신감이 충만한 편이다. 길은 어디로든 이어지게 되어 있다라는 걸 믿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어져 있을 길을 걸었다. 숙소까지 걷는 그동안 모든 게 소름끼칠 정도로 신기했다. 바르셀로나에 와 있다는 것도, 알지도 못할 이 길을 떠돌며 걷고 있는 것도. 시에스타를 충분히 즐긴 스페인 사람들은 기운차게 거리에서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숙소 앞에는 빅터가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한국은 코로나가 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때 스페인은 확진자가 5명 미만인 상태) 코로나 때문에 머무는데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확 몰려왔다. 그럼에도 방긋 웃으며 한국은 그런대로 대처를 잘하고 있다 답했다.


빅터의 집엔 빅터의 게이 남자친구 데이비드가 함께 살고 있었고, 내 옆방엔 미국인 남자가 머물고 있었다.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바르셀로나 시간은 밤 10시였고 한국은 새벽 5시였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그러다 눈을 번쩍 떴다. 휴대폰 시계가 12시30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미칭 조때따"하며 카톡이 와있는 친구들에게 답을 했다. 내가 그렇게 피곤했나?? 점심 때가 다 되어 일어났으니 오늘 관광은 물 건너갔구나. 했는데 낮 12시가 아니라 자정 12시였다. 한국 시간으로 출근을 하고 있는 친구와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새벽 3시, 4시, 그렇게 6시가 되었다. 시간대별로 하늘색이 달라지는 테라스 너머를 구경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을 했다.


나 진짜 스페인에 있구나.






바르셀로나 시간으로 오전 9시.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른 아침일 거라고 했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거리는 거의 텅 비어 있었고, 식재료 혹은 무언가를 나르는 차들이 이제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 오고갔다. (마치 한국시간으로 아침 6, 7시 같은 느낌) 전날 기내식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아침은 좀 거하게 먹고싶었다. 구글맵을 보니 숙소 근처에 팬케이크 맛집이 있어 La Desayunería를 찾아갔다.

입구부터 스페인 감성보다는 플로리다 혹은 그 어딘가의 감성이었다. 많이, 든든하게 먹어야지 싶어 플래터 세트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따뜻한 커피가 식도를 타고 들어가 뱃속에 안착되는 순간 무한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플래터 세트를 다 먹기는 커녕, 토마토와 에그 스크램블 정도만 깨작 거리고 가게를 나왔다.


날이 추웠다.






2월의 스페인 날씨는 한국으로 치면 봄 정도라고 했는데 기온이 좀처럼 오르질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두툼한 패딩 차림이었는데 홀로 꿋꿋하게 봄 원피스를 입은 그 상태로 아침을 걸었다.






T-casual을 사서 처음 지하철을 이용했다. 바르셀로나 지하철은 생각보다 간단했고, 나도 꽤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전날 버스로 지나왔던 에스파냐 광장을 먼저 갔다. 콜럼버스 기념탑을 천천히 보면서 직선으로 뻗은 국립미술관으로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때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첫 직장 선배였다. 선배는 내게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퇴사라는 단어가 영 어색했지만 퇴사 후 여행을 왔다고 말하자 선배는 너무너무 잘했다고, 정말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정말 행복했음 좋겠어요. 당신을 함부로 대했던 그런 악의 무리 따윈 다 잊고 행복만 해요. 당신만 생각해 진짜."


다들, 나만 생각하라는 말을 한다. 그때는 그게 어떤 뜻인지 잘 몰랐는데 떠나보니, 떠나고 보니 알 것 같다. 그건 내 우주를 통틀어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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