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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03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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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Nov 14. 2021

출판사에 뼈를 묻을 줄 알았더니만



안녕, J. 나는 계속 회사에 다니고 있어. 왠지 계속 회사에 다니면 안 될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이건 너무도 당연한 결말(?)과 과정인 거겠지. 직장인들의 최종 꿈이 퇴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 역시 퇴사를 꿈꾸고, 이루고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어디로든) 계속 갈 예정이야.


J, 네게 긴긴 나의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편지(일기)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사실 별 게 없어. 나는 요즘도 휴대폰 메모장에 내가 겪고 느낀 것들을 매일 일기로 남기거든. 최근에 작년 하반기와 지금까지의 일기를 모아서 보니 대부분이 회사 이야기인 거야. 단순하게 ‘회사’라는 단어로만 끝나면 좋을 일들이긴 한데 “나는 왜 이렇게 일을 못할까?”, “난 왜 항상 이 모양일까…”라는 자기 파괴적인 깨달음이 대부분이라는 거지. 그때 다시 생각해봤어.


‘나 변태인가.’



21년 8월10일, 일하다 말고 남겼던 메모



이렇게까지 자신을 채찍질하고, 폭력적인 생각과 언어로 나 스스로를 저 세상 끝까지 보내버리는 거. 지금까지 난 이렇게 불친절한 방법으로 성장을 해온 걸까 싶었어. 내가 잘못하지 않은 거에 대해서도 상대를 이해하려고 항상 애썼고, 누군가를 탓할 줄도 몰라 심지어. 이런 바보 멍충이가 또 있을까.


J, 나는 올해 2월 퇴사를 했어. 8년 가까이 다녔던 곳이고 나는 그 회사에서 10년 이상은 다닐 줄 알았지. 그곳을 다니면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정말 내 뼈 한 조각씩 떼어내 회사 부지에 묻으면서 다닐 줄 알았던 거지. 좆같아도 어쩌겠냐, 먹고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10년 이상은 더 하면서 살 줄 알았어. 회사에 주어진 복지들 하나하나씩 다 누리기도 하면서, 퇴사하는 선배 또는 후배들을 보며 그들의 자유로움에 부러워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인생이 언제 내 생각처럼 흘러갔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알잖아 J, 나는 이직을 하려고 했어도 엎어졌던 순간들이 많아. 이직할 회사를 정해놓고 사직서까지 제출했는데 이직하려던 회사에서 나를 대단히 크게 오해하고 비난하는 바람에 입사가 취소되었던 적도 있어. 그 당시 나를 오해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아주 많이 후회하고 어떤 형식으로든 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온 곳과 머물고 성장한 그곳들이. 내 가슴 반쪽을 새까맣게 태워놓고 ‘그래도, 너를 무척 아꼈어. 너를 응원해.’라는 말 한마디로 나의 20대 전부를 위로해보려 하고 있어. 까맣게 그을린 반쪽 가슴에게는 이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아. 말을 거는 순간 내가 왔던 곳으로부터 힘들 때마다 흔들리고 설득당하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아주 아주 많아. 그 이유들은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3봉지에도 다 안 담길 정도일 거야. 그 많은 수 백 가지의 이유들 중에서도 가장 작고 사소한 이유였는데 40명이 넘는 그 조직에서 커피 머신을 제대로 닦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3명도 채 되지 않았어. 물받이에 물이 넘쳐흐르고 커피 찌꺼기 통에 곰팡이가 꽃을 필 때까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데 그럴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와 나의 선배였어. 대표님이 커피 머신을 청소하는 나를 보며 항상 하는 이야기야.


“평강 씨 아니면 누가 이 커피머신 관리를 하겠어.”


임직원 모두 커피머신 관리 교육을 받을 순 없으니 알고 있는 누군가라도 열심히 하는 건 맞아. ‘내 일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 진짜 저런 사소한 것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을 테니까. 내 몫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한테 남이 시키지도 않은 주제넘고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게 생긴 건가…) 그런데 어느 날엔가 커피머신 작동에 이상이 있었는데 이것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던 것에 화가 난 대표님이 내게 하루 동안 커피머신 사용하지 말라고 임직원들에게 전체 공지를 하라는 거였어. 전체 공지하는 거 어렵지 않아. 공용으로 사용하는 기계인데 다들 너무 소홀하게 대했다는 거에 화가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 지쳐 있었던 것 같아. 마케팅실 살림은 내가 전부 챙겨야 했고, 선배 팀장님들의 두루뭉술한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마치 3D 프린터 마냥 그대로 구현해야 하는 것이 내 몫이었으니까.


쓰레기통에 수북하게 쌓인 차갑게 식은 커피 찌꺼기가 마치 나 같았어. 수 없이 갈리고, 쥐어짜져서 쉽게 바스러지는 가루가 되어 버린 게.


(장난인 줄은 알지만)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라야 해. 갈 곳 없으면 이쪽(이 업계)으로 와.”


그 말이 어떨 땐 돌아갈 집이 있구나 라는 말로 들릴 때도 있고, 네가 무슨 IT고 스타트업이야. 그냥 돌아와서 네가 해왔던 일들이나 해.라고도 느껴질 때가 있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야. 그런데 J, 나는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 5년, 10년이 지나서도 그럴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때도 어쩌면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았지만, 이 우당탕탕 좌충우돌 스타트업에서 두부 멘탈에 착하고 바보 같은 나도 살아 있다고(또는 살아남았었다 라고) 네게 들려주고 싶어.





조제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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