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일기 01.
편지를 써야지, 마음먹고 시작을 한 건 아니야. 내 침대 왼편엔 꿀룡이라는 목이 긴 인형이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누워있어. 얘는 이름이 꿀룡이인 것처럼 매일을 감은 눈으로 사는 친구야. 그리고 그 너머에는 창문이 있는데 나는 그 창문을 꼬옥 닫아두지 않아. 누우면 하늘이 아주 잘 보이는 위치거든. 잠이 오지 않는 날엔 창 밖을 멍하니 바라만 본 적이 있어.
요즘 그런 날들이 꽤, 자주 반복 돼. 유튜브에 소위 말하는 ‘잠이 잘 오는 음악’, ‘듣자마자 꿀잠자는 음악’ 같은 것들을 틀어 놓아도 그 음악 전체 트랙이 다 돌아갈 때까지도 잠들지 못해. 그냥, 적막한 방안에 울리는 화이트 노이즈가 싫어서 BGM 정도로 깔아 둔다라고 하는 쪽이 더 맞는 것 같아.
J, 네게 편지를 쓰게 된 건 두 눈을 감고 ‘정말 모르겠어…’라는 생각이 무섭게 몰아쳤기 때문이야. ‘정말 모르겠다’라는 생각은 꽤 큰 심연을 가지고 내게 다가오는 편이야. 무섭게도, 그 생각은 내가 우주에서 가장 쓸모없구나 라는 결말까지 빠른 시간 안에 도달하게 만들어. 그래서 벌떡 일어나 J네게 이 편지를 쓰게 되었어.
오늘은 말야, 거의 칼퇴를 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집에 너무너무 들어가기 싫어지는 거야. 지하철역에 내린 그 순간부터 내가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계획을 촤라락- 하고 생각해 보았어. 나의 퇴근 후 일상은 대충 이래.
□저녁식사
□아치 밥 주기
□아치 약 주기
□운동하기
□빨래 돌리고 널기
□뉴스 보기
□유튜브 보다 잠들기
대략 저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오늘은 저녁도 먹지 않고 답답하니까 나가서 걸어야겠다 생각을 했어. 근데 비가 막 쏟아지더라구. 1층까지 내려갔다가 결국 다시 돌아서 올라왔어.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하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먹어서 뭐하냐’ 하는 생각이 아주 크게 드는 거야. 집 안에서 자전거를 타며 좋아하는 유튜버의 영상들을 돌려봤어.
“이번 주말에 꼭 치킨 시켜 먹어야지.”
그리고 전 회사 팀장님과 통화를 길게 나눴어. 뭔가 되게 오피셜 하고 그런 건 아니야. 내게는 정말 친언니 같은 분이거든. 그냥 오늘 하루 어땠는지, (내가 퇴사한) 회사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등등을 나누다가 팀장님이 그러셨어.
“조제야,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아. 조급해하면 그 절박함에 시야가 좁아져서 오히려 최악을 선택할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말했어.
“저도, 요즘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 모르겠어요 팀장님.”
그 뒷말에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어.
“그래서, 그냥 더는 살고 싶지 않아요.”
J, 나도 분명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 거야. 바로 지지난 주에도 소소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겠지? 지난달에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 행복했던 순간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아.
나는 말야 타인의(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맞는 표현 같다) 고민과 슬픔이 그 어떤 허들 하나 없이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드는 타입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요즘 가장 많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 그럼에도 형식적으로라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를 못했어.(그 말 조차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어) 그 모습을 그냥 가만하게 바라만 보는 중이야. 오롯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방향을 따라 가고만 있어.
이렇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이 방향이 맞는 거겠지? 내가 혹시 물길을 거슬러서 올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J, 나는 요즘 그것도 잘 모르겠어. 물길을 따라가는 건 오롯이 혼자다 보니 이 방향이 맞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J네게 그래도 이렇게 편지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어. 조금은 후련해진 것 같거든. 행복이라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 볼게. 우선, 지난주에 사두었던 화이트 와인을 꼭 마실래. 안주는, 천천히 상상해 보면서 그 상상하는 순간들을 누려볼게. (떡볶이가 좋으려나…)
이제는 자야 할 것 같아.
J, 곧 다시 편지를 쓸게.
맥락 없는 이 편지를 읽어주어 고마워.
조제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좋아합니다.